레고인가, 조각상인가? 블록체인을 짓는 두 가지 철학 morgan021 2025.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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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철학이 존재한다. 하나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획되고 통제된 하나의 거대한 조각상을 깎아내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표준화된 블록을 제공하여 누구나 자신만의 도시를 짓도록 허용하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 접근법은 우리가 디지털 자산과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 즉 블록체인 아키텍처의 핵심에서 극명하게 대립하며, 각각 다른 미래를 제시한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디지털 경제의 기반은 단 하나의 방식으로만 지어지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검증된 하나의 거대한 성곽 안에서 완벽한 보안을 추구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주권과 유연성을 외치며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의 연합을 꿈꾼다. 이 두 가지 설계 사상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기술적 우위를 가리는 것을 넘어 우리가 앞으로 어떤 형태의 디지털 사회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다.

일체형(Monolithic) 클라이언트
가장 전통적이고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접근법은 일체형, 즉 모놀리식 클라이언트 아키텍처다. 이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거대한 스마트 컨트랙트 플랫폼의 구조다. 이 아키텍처에서 블록체인을 구동하는 모든 핵심 요소들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단일 소프트웨어로 묶여있다. 이러한 핵심 요소에는 네트워크상의 노드들이 어떻게 동일한 시간에 동의하는지를 다루는 합의 알고리즘, 노드 간에 거래와 블록을 전파하는 네트워킹 계층, 그리고 사용자의 애플리케이션 로직을 실행하는 가상 머신(VM) 및 상태 관리 등이 포함된다.
이 방식의 가장 큰 미덕은 견고함과 최적화다. 모든 구성 요소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으므로, 개발팀은 이 단일 클라이언트를 극도로 최적화할 수 있다. 성능은 예측 가능하며, 보안 모델은 명확하다. 모든 애플리케이션은 이 거대한 성곽 안에서, 성곽이 제공하는 단 하나의 법률(가상 머신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이것은 강력한 통일성과 검증된 안정성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 견고함은 유연성의 상실이라는 막대한 비용을 치른다. 만약 개발자가 이 시스템의 아주 작은 규칙 하나, 예를 들어 거래 수수료를 계산하는 방식을 변경하고 싶다면, 그는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모든 노드 운영자를 설득하여 이 거대한 단일 소프트웨어의 업그레이드에 동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정치적 행위, 즉 하드포크를 요구한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성곽 안에서 살아야 하므로, 성곽의 설계를 바꾸는 것은 거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당신은 이 안에서 완벽하게 보호받지만, 당신만의 규칙을 만들 자유는 없다.
모듈형(Modular) 프레임워크
일체형 클라이언트의 경직성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것이 바로 모듈형 프레임워크, 즉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SDK) 접근법이다. 이 철학은 블록체인을 하나의 완성된 성곽이 아닌, 성곽을 지을 수 있는 최고급 건축 자재(모듈)의 집합으로 바라본다.
이 프레임워크는 블록체인의 핵심 기능들을 표준화된 '레고 블록'처럼 제공한다. 합의를 위한 모듈, 네트워킹을 위한 모듈, 사용자의 계좌와 자산을 관리하는 '은행' 모듈, 지분 증명을 처리하는 '스테이킹' 모듈 등이 그것이다. 개발자는 더 이상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만들 필요가 없다. 이미 검증된 이 표준 모듈들을 가져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립하기만 하면 된다.
이 방식의 장점은 압도적인 유연성이다. 만약 당신이 표준 '은행' 모듈의 기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간단히 그 모듈을 제거하고 당신의 비즈니스 로직에 맞는 새로운 은행 모듈을 직접 코딩하여 교체할 수 있다. 표준 합의 모듈을 사용하되, 네트워킹 규칙만 변경하는 것도 가능하다. 개발자는 더 이상 거대한 시스템의 세입자가 아니라, 자신만의 규칙을 가진 독립적인 블록체인을 구축하는 주권자가 된다.
물론 이 자유에도 책임이 따른다. 일체형 클라이언트가 제공하던 단일한 보안 모델 대신, 이제 시스템의 보안은 각 모듈의 품질과 그 모듈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달려있다. 레고 블록 하나가 부실하게 만들어졌다면, 그 블록과 연결된 모든 구조물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애플리케이션 특화 블록체인
이 '개발 키트'로서의 모듈형 프레임워크가 큰 힘을 발휘하는 지점은 '애플리케이션 특화 블록체인(AppChain)'이라는 개념에서다. 왜 모든 애플리케이션이 굳이 범용 가상 머신 위에서, 동일한 수수료 정책을 감당하며 경쟁해야 할까? 앱마다 각각 다른 체인을 사용하면 더 효율적일 텐데 말이다.
예를 들어, 초당 수천 건의 거래를 처리해야 하는 고빈도 금융 거래소(DEX) 애플리케이션을 생각해 보자. 이 애플리케이션을 범용 플랫폼 위에서 실행하는 것은, 스포츠카를 꽉 막힌 도심 도로에서 운전하려는 것과 같다. 이 애플리케이션은 범용 가상 머신이 제공하는 복잡한 연산 기능 대부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주문 체결'이라는 단 하나의 기능에 모든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
모듈형 프레임워크를 사용하면, 개발자는 이 금융 거래소 앱만을 위한 전용 블록체인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 그는 불필요한 범용 가상 머신 모듈을 제거하고, '주문 체결' 로직 자체를 애플리케이션의 가장 깊은 기반, 즉 네이티브 레벨에 직접 구현한다. 그 결과, 이 체인은 다른 모든 기능을 희생하는 대신, 오직 금융 거래 처리 속도라는 단 하나의 목표에 대해서는 최고의 성능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모듈형 프레임워크가 제공하는 '애플리케이션 특화'의 장점이다. 각 도시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산업(기능)을 중심으로 최적화될 수 있다.
VM 플러그인의 개념
그렇다면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까? 일체형의 검증된 애플리케이션 생태계인가, 아니면 모듈형의 유연성과 주권인가?
최근의 가장 흥미로운 접근 방식은 이 두 세계를 결합하는 '하이브리드' 설계다. 이는 모듈형 프레임워크라는 '레고 베이스' 위에, 일체형 클라이언트의 핵심인 '범용 가상 머신(VM)'을 또 하나의 '레고 블록'으로 꽂아 넣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VM 플러그인' 개념이다. 이 구조에서 가상 머신은 더 이상 시스템의 유일한 주인이 아니라, '은행' 모듈이나 '스테이킹' 모듈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하나의 선택적 부품이 된다.
그 결과는 강력하다. 개발자는 자신만의 독립적인 체인을 구축하는 '모듈형'의 주권을 누리면서도, 동시에 이미 검증된 수천 개의 범용 애플리케이션을 자신의 체인에서 즉시 실행할 수 있는 '일체형'의 호환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것은 분리되어 있던 두 세계의 장점만을 결합하려는 대담한 시도다. 하지만 이는 두 시스템의 복잡성을 모두 상속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네이티브 모듈의 세계와 가상 머신의 세계가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지, 그 '이음새'에 대한 정교한 설계가 필요해진다.
두 아키텍처의 상호운용성 비교
이렇게 각자의 철학으로 지어진 성곽(일체형)과 도시(모듈형)들은 어떻게 서로 소통할 수 있을까? 고립된 섬들은 그 자체로 완벽할지 몰라도, 연결되지 않으면 가치를 확장할 수 없다.
일체형 클라이언트들은 태생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그들은 외부 세계를 신뢰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따라서 이들 사이의 통신은 대부분 '신뢰 기반 브릿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제3의 중개자가 한쪽 체인의 자산을 금고에 잠그고, 다른 쪽 체인에서 그에 상응하는 증서를 발행해주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편리하지만, 우리는 이 중개자의 금고가 해킹당하여 모든 것이 사라지는 비극을 수없이 목격해왔다.
반면, 모듈형 프레임워크, 특히 동일한 기반(SDK)을 공유하는 체인들은 '표준화된 통신 프로토콜'을 통해 서로 연결될 수 있다. 이 프로토콜은 인터넷을 움직이는 TCP/IP와 유사하다. 중개자를 신뢰하는 대신, 각 체인이 상대방 체인의 암호학적 증명(헤더)만을 직접 검증하는 '무신뢰' 방식을 사용한다. 이 표준 프로토콜을 통해,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연방처럼 자유롭게 데이터와 자산을 교환한다. 이것은 중앙의 금고에 의존하는 방식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확장 가능한 '블록체인의 인터넷'을 형성한다.
미래 호환성
이 모든 논의는 '미래 호환성'이라는 마지막 개념으로 수렴한다. 'VM 플러그인'을 탑재한 하이브리드 모듈형 체인은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
첫째, 현재의 호환성이다. 이 체인은 표준 VM과 100% 동일하게 작동하므로, 기존의 모든 개발 도구와 애플리케이션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둘째, 이것이 핵심이다. '미래의 호환성', 즉 확장성이다. 표준 VM은 스스로를 '결정론적 감옥' 안에 가두어 외부 세계(네이티브 모듈)와 소통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VM 플러그인을 탑재한 모듈형 체인은 이 감옥의 벽에 특별한 창문을 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프리컴파일(Precompile)' 또는 'EVM 확장'이라고 부르는 기능이다. 이 창문을 통해, 감옥 안에 갇혀 있던 VM은 네이티브 프레임워크의 '은행' 모듈에 직접 말을 걸어 자산을 전송하거나, '스테이킹' 모듈을 호출하여 지분을 위임하거나, 심지어 '표준 통신 프로토콜'을 호출하여 다른 체인으로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다.
VM은 표준을 준수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설치된 네이티브 환경의 고유한 기능까지 흡수하여 '확장된 VM'으로 진화한다. 이는 일체형 아키텍처는 결코 제공할 수 없는 강력한 기능이다. 물론, 이 복잡한 '이음새'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보안 위협이 탄생하는 지점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결국, 아키텍처의 선택은 견고한 과거와 유연한 미래 사이의 트레이드오프다. 일체형 성곽은 검증되었지만 정체되어 있고, 모듈형 도시 연방은 역동적이지만 그 연결 통로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어떤 미래를 선택하든, 그 구조의 근본적인 장단점을 이해하는 것은 이 새로운 디지털 세계를 항해하는 필수적인 나침반이 될 것이다.
3줄 요약
- 전통적인 '일체형 클라이언트'는 합의와 애플리케이션이 묶인 견고한 구조지만, 유연성이 낮고 확장이 어렵다.
- '모듈형 프레임워크'는 개발 도구(SDK)로서, 필요한 기능을 레고처럼 조립하여 특정 비즈니스 로직에 최적화된 '애플리케이션 특화' 체인을 만들 수 있게 한다.
- VM을 '플러그인' 모듈로 추가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은, 표준 VM 호환성과 네이티브 기능('프리컴파일')을 통한 '미래 호환성'을 동시에 제공하지만, 두 세계의 이음새에서 새로운 보안 복잡성을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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