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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술을 말할 때 종종 자유, 무한한 가능성, 연결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더리움 가상 머신(EVM)의 세계는 정반대의 철학 위에 세워졌다. EVM은 자유가 아닌 엄격한 통제, 가능성이 아닌 예측 가능성, 그리고 무작위적인 연결이 아닌 완벽한 격리를 통해 그 가치를 증명한다. EVM은 창의적인 기계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지루한 계산기, 즉 신성한 감옥이다.

 

이 기계가 왜 블록체인이라는 거대한 현상의 심장이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엄격한 규칙에 묶여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이 시스템의 본질을 꿰뚫는 일이다. 우리는 이 기계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코스모스 EVM 같은 새로운 도전이 이 견고한 감옥의 벽을 어떻게 두드리고 있는지 탐구할 것이다.

 

상태(State)의 정의: 그 순간의 완벽한 스냅샷

EVM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상태라는 단어다. 상태(State)란 무엇인가. 그것은 특정 시점의 네트워크에 대한 완벽하고 완전한 스냅샷이다. 마치 특정 순간에 세상 모든 것을 사진 한 장에 담아내는 것과 같다.

 

이 스냅샷에는 모든 것이 기록된다. A라는 지갑이 얼마의 잔액을 가졌는지, B라는 스마트 컨트랙트의 영구 저장소(Storage)에는 어떤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는지, C라는 컨트랙트의 코드는 무엇인지. 이 모든 정보의 총합이 바로 이더리움의 현재 상태, 즉 월드 스테이트(World State)다.

 

블록체인은 이 상태를 저장하는 거대한 장부다. 블록이 하나 생성될 때마다, 네트워크는 이전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이동한다. 이더리움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전 세계 수만 대의 컴퓨터(노드)는 모두 이 동일한 '상태 스냅샷'을 공유하고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들이 동의하는 것은 과거의 거래 기록이 아니라, 바로 이 현재 상태의 모습이다.

 

이 상태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가 은행 앱을 열었을 때 보는 잔액은 은행의 중앙 서버가 보관하는 '상태'다. 이더리움에서 나의 토큰 잔액은 네트워크 전체가 합의한 '상태'에 기록된 값이다. 이 상태값이 없다면 디지털 자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상태 전이 함수: 현실을 바꾸는 유일한 규칙

상태가 멈춰 있는 스냅샷이라면, 이 스냅샷을 다음 스냅샷으로 바꾸는 엔진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상태 전이 함수(State Transition Function)다.

 

EVM의 본질은 이 상태 전이 함수를 실행하는 기계다. 공식처럼 표현하자면 간단하다. (이전 상태 + 새로운 트랜잭션 묶음) -> 새로운 상태.

 

여기서 트랜잭션은 상태를 변경해 달라는 유일한 '요청서'다. 내가 친구에게 1 이더를 보내는 트랜잭션은, 이전 상태(내 잔액 10, 친구 잔액 5)를 받아 EVM이라는 함수를 통과한 뒤, 새로운 상태(내 잔액 9, 친구 잔액 6)를 반환하라는 명령이다.

 

EVM은 이 명령을 저수준 명령어인 옵코드(Opcodes) 단위로 처리한다. ADD, SUB, SSTORE(스토리지에 저장) 같은 기본 동작들이다. 스마트 컨트랙트 코드는 결국 이 옵코드의 집합으로 변환되어 EVM에서 실행된다.

 

중요한 것은 이 함수가 순수 함수(Pure Function)처럼 작동한다는 점이다. 동일한 입력(이전 상태와 트랜잭션)이 주어지면, 누가 언제 어디서 이 함수를 실행하든 반드시 동일한 출력(새로운 상태)을 내놓아야 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변수도 허용되지 않는다.

 

결정론(Determinism)의 중요성: 신뢰를 위한 족쇄

바로 이 지점에서 결정론(Determinism)이라는 EVM의 핵심 철학이 등장한다. 결정론적이라는 말은, 모든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동일한 입력에는 반드시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1 더하기 1은 서울에서도, 뉴욕에서도, 그리고 10년 뒤 화성에서도 2여야만 한다.

 

이것이 왜 블록체인에서 신성불가침의 원칙이 되었을까. 바로 합의(Consensus) 때문이다. 이더리움 네트워크는 중앙 서버가 없다. 전 세계 수만 대의 노드가 자발적으로 참여해 동일한 장부를 유지한다. 만약 이 노드들이 동일한 트랜잭션을 실행했는데 서로 다른 결과를 얻는다면 어떻게 될까.

 

A 노드는 트랜잭션 실행 결과 '내 잔액이 9'라고 계산하고, B 노드는 '내 잔액이 8'이라고 계산한다면, 네트워크의 '상태'는 두 갈래로 찢어진다. 합의는 깨지고, 네트워크는 분열되며, 블록체인 자체가 붕괴한다. '단 하나의 진실'이라는 블록체인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EVM은 이 결정론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바로 외부 세계와의 모든 연결을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다.

 

EVM이 할 수 없는 것들: 격리된 기계의 한계

결정론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EVM의 금기 사항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비결정론적(Non-deterministic) 요소들이다.

 

첫째, EVM은 인터넷에 연결할 수 없다. 스마트 컨트랙트가 외부 웹사이트의 API를 호출해 환율 정보를 가져온다고 상상해 보자. A 노드가 API를 호출한 1초 뒤, B 노드가 같은 API를 호출했을 때 그 사이 환율이 변했다면? 두 노드는 서로 다른 환율 정보를 받게 되고, 상태 전이 함수의 입력값이 달라져 결국 다른 '새로운 상태'를 계산하게 된다. 합의는 깨진다. 이것이 오라클(Oracle)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다.

 

둘째, EVM은 진정한 난수(Random Number)를 생성할 수 없다. block.timestamp(블록 생성 시간)나 block.difficulty(채굴 난이도) 같은 값을 조합해 무작위성처럼 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이 값들조차 블록 헤더에 기록되어 모든 노드가 공유하는 정보다. 누구나 다음 블록이 생성되기 전에 그 값을 예측하고 조작할 수 있다.

 

셋째, EVM은 실시간 시계에 의존할 수 없다. block.timestamp는 노드마다 미세하게 다를 수 있는 로컬 시간이 아니라, 블록 생성자가 블록에 찍어 넣는 합의된 시간 정보다.

 

이처럼 EVM은 스스로를 완벽히 격리된 샌드박스 안에 가두었다. 오직 트랜잭션이라는 정제된 입력값만을 받아, 내부의 엄격한 규칙(옵코드)만으로 다음 상태를 계산한다. 이 완벽한 격리와 통제, 이것이 바로 EVM이 신뢰를 얻는 방식이다.

 

블록의 역할: 상태를 원자적으로 굳히는 망치

트랜잭션이 상태 변경 '요청'이라면, 블록(Block)은 이 변경 사항을 '확정'하는 역할을 한다. EVM이 계산한 새로운 상태를 공식적으로 네트워크의 역사에 기록하는 행위다.

 

블록은 여러 개의 트랜잭션을 묶어서 한꺼번에 처리한다. 이 묶음 처리는 매우 중요하다. 이를 원자적(Atomic) 업데이트라고 부른다.

 

만약 내가 10 이더를 A에게 보내고, A는 그 10 이더를 받아 B에게 보내는 두 개의 트랜잭션이 한 블록에 담긴다면, EVM은 이 둘을 순서대로 실행한다. 하지만 만약 나의 첫 번째 트랜잭션이 실패한다면(예: 잔액 부족), A가 B에게 보내는 두 번째 트랜잭션도 자동으로 실패한다.

 

즉, 블록 단위로 묶인 트랜잭션들은 전부 성공하거나, 혹은 하나라도 실패하면 그 실패 지점까지의 모든 변경 사항이 취소(Revert)된다. 상태는 블록 이전의 '스냅샷'으로 되돌아간다.

 

이 원자성 덕분에 네트워크의 상태는 항상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A의 잔액이 마이너스가 되는 일도, B가 있지도 않은 돈을 받는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 블록은 EVM이 계산한 '새로운 상태'를 검증하고, 모든 노드가 동의하는 다음 현실로 나아가기 위한 거대한 망치질이다.

 

Cosmos EVM의 도전: 결정론의 기계와 비동기 우주의 연결

지금까지 우리는 EVM이 왜 그토록 폐쇄적이고 엄격해야 하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여기, 이 폐쇄적인 EVM을 데리고 나가 다른 블록체인과 소통하게 만들려는 야심 찬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Cosmos EVM이다.

 

Cosmos EVM은 Cosmos SDK라는 블록체인 개발 프레임워크 위에서 EVM을 모듈로 실행한다. Cosmos의 핵심 철학은 상호운용성, 즉 IBC(Inter-Blockchain Communication) 프로토콜을 통해 수백 개의 독립적인 체인이 서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것이다.

 

여기서 거대한 모순이 발생한다. EVM은 결정론을 위해 외부 세계를 차단했는데, IBC는 본질적으로 외부 세계(다른 체인)와의 비동기(Asynchronous) 통신이다. 내가 다른 체인으로 자산을 보냈을 때, 그 요청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언제 응답이 올지 EVM은 즉시 알 수 없다. 이는 EVM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Cosmos EVM은 이 모순을 '프리컴파일(Precompiles)'과 'EVM 확장(Extensions)'이라는 영리한 다리를 통해 해결한다. 솔리디티 컨트랙트가 IBC 전송을 호출하면, EVM은 이 요청을 프리컴파일이라는 특별한 주소로 보낸다. 이 요청을 받은 Cosmos EVM 모듈은 EVM의 실행을 잠시 '멈추지 않고' 즉시 '요청 접수됨'이라고 응답한다. EVM의 트랜잭션은 일단 성공으로 처리되고 결정론은 유지된다.

 

실제 IBC 통신은 EVM 바깥의 네이티브 Cosmos SDK 모듈이 비동기적으로 처리한다. 나중에 다른 체인에서 응답(성공 또는 실패)이 돌아오면, 그 결과는 다음 블록의 트랜잭션으로 EVM의 상태에 반영된다.

 

이것은 EVM이라는 결정론적 기계의 규칙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IBC라는 비동기적 우주와 소통하는 방식이다. Cosmos EVM은 '세계 컴퓨터'를 '우주(Cosmos) 컴퓨터'로 확장하려 한다. 이 도전은 결정론이라는 신성한 감옥의 벽에, 다른 세계로 통하는 창문을 내려는 시도다. 그리고 이 창문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균열이다.

 

 

< 3줄 요약 >

  1. EVM은 (이전 상태 + 트랜잭션) -> (새 상태)를 계산하는 '상태 전이 함수'이며, 모든 노드가 동일한 결과를 얻어야 하므로 완벽한 '결정론'을 따른다.
  2. 이 결정론을 지키기 위해 EVM은 외부 인터넷 API 호출이나 실시간 데이터 접근 같은 비결정론적 요소를 스스로 차단하고 격리된 환경에서 작동한다.
  3. Cosmos EVM은 이 결정론적 EVM이 IBC 같은 비동기 외부 통신을 할 수 있도록, 프리컴파일을 통해 EVM의 규칙을 깨지 않으면서 네이티브 모듈과 상호작용하는 다리를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