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의 노예에서 취향의 신민으로: 새로운 권력의 이동 morgan021 2025. 11. 24.
> _
풍요라는 이름의 고문실, 우리는 선택하다 늙어 죽을 것이다
퇴근 후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켠다. 맥주 한 캔을 따고 '오늘은 기필코 끝내주는 영화를 한 편 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로맨틱 코미디 섹션을 훑다가, 스릴러 섹션을 기웃거리고, 요즘 뜬다는 다큐멘터리 예고편을 3초 정도 보다가 끈다. 스크롤을 내리고, 또 내린다. 썸네일들이 화려하게 춤을 추며 시선을 강탈한다. 그렇게 40분이 흐른다. 맥주는 미지근해졌고, 결국 지친다. 결국 봤던 시트콤을 다시 틀어놓고 스마트폰을 든다. 익숙한 풍경인가?
이건 비단 OTT 플랫폼만의 문제가 아니다. 점심 메뉴를 고르기 위해 배달 앱을 켰을 때, 립스틱 하나를 사기 위해 올리브영에 들어갔을 때, 심지어 주말에 읽을 책 한 권을 고르기 위해 서점에 갔을 때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데,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빈곤한 기분을 느낀다. 너무 많은 선택지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현대인은 '자유'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있다.
10억 개의 콘텐츠가 매일 쏟아지는 세상이다. 유튜브에 1분마다 올라오는 동영상의 양은 네가 평생을 바쳐도 다 못 볼 분량이다. 과거에는 정보가 없어서 문제였지만, 지금은 정보가 너무 많아서 문제다. 정답이 너무 많다는 건, 역설적이게도 정답이 하나도 없다는 뜻과 같다. A라는 뷰티 유튜버는 '이 크림이 최고'라 하고, B라는 피부과 의사는 '그 성분은 독'이라고 한다. 둘 다 맞는 말 같고, 둘 다 틀린 말 같다. 이 혼란 속에서 뇌는 과부하가 걸려버린다. 심리학자들은 이걸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라고 부르지만, 나는 좀 더 직관적으로 '풍요가 낳은 결정 장애'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이제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스스로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누군가 내 멱살을 잡고 "그냥 이거 해, 닥치고 이거 사, 이게 정답이야"라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뇌를 쓰기 싫은 거다. 실패할까 봐 두려운 거다. 수만 가지 선택지 중에서 최선의 하나를 고르지 못했을 때 오는 그 찜찜함, 기회비용에 대한 공포가 너를 짓누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친절하게 선택지를 나열해 주는 가이드가 아니라, 오히려 거칠게 선택지를 찢어버리는 독재자를 기다린다.

더하는 건 하수, 빼는 건 고수, 지우는 건 신의 영역
여기서 큐레이션의 개념이 완전히 뒤집힌다. 옛날의 큐레이터는 '박물관 학예사'처럼 좋은 것을 많이 수집해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요. 취향대로 골라보세요." 이건 친절하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이런 태도는 직무 유기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물을 더 붓는 꼴이니까.
진짜 능력 있는 큐레이터는 이제 '편집자'가 아니라 '검열관'에 가까워야 한다. 무엇을 더할까(Add)를 고민하는 건 하수다. 무엇을 뺄까(Subtract)를 고민하는 건 고수다. 하지만 무엇을 아예 삭제해 버리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까(Delete)를 고민하는 건 신의 영역이다. 그렇게 대중은 자신의 시야를 좁혀주는 사람에게 열광한다.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생각해 보자. 왜 우리는 오마카세에 열광할까? '오마카세'라는 말 자체가 '맡긴다'는 뜻이다. 거기엔 메뉴판이 없다. 셰프가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알레르기가 있지 않은 이상, "저는 연어 말고 광어로 주세요"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 돈은 비싸게 내는데, 권력은 셰프가 쥔다. 그런데 그 경험이 짜릿하다. 내가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 전문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구성한 완벽한 코스를 그냥 받아먹기만 하면 되니까. 우리는 그 '통제'와 '구속'을 사기 위해 수십만 원을 지불한다.
패션계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백화점처럼 모든 브랜드가 다 있는 편집숍이 인기였지만, 이제는 주인장의 취향에 맞지 않는 브랜드는 가차 없이 입점을 거부하는 소규모 부티크가 뜬다. 그곳에 가면 옷이 별로 없다. 하지만 거기 걸린 옷들은 주인이 수천 벌의 옷 중에서 999벌을 '쓰레기'라고 판정하고 남겨둔 1벌의 생존자들이다. 소비자는 그 1벌을 사는 게 아니다. 그 1벌을 골라내기 위해 주인이 썼을 시간과 안목, 그리고 나머지 999벌을 거부한 그 '단호함'을 사는 것이다.
이제 '다양성'은 미덕이 아니다. 다양성은 혼란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확실성'이다. 그리고 그 확실성은 오직 과감한 삭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진짜 시간을 아껴주는 사람은 정보를 많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머지는 다 쓰레기니까 볼 필요 없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다. 그 오만함이 우리를 안심시킨다.
"설명은 생략한다"는 그 오만함이 가장 섹시한 이유
이 새로운 독재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리? 근거? 데이터? 그런 건 하이테크 시대의 촌스러운 유물이다. 설명이 길어지면 변명처럼 들린다. 설명이 구체적일수록 반박할 여지가 생긴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선언한다. "이게 힙(Hip)한 거야. 싫으면 나가."
이런 태도를 '취향의 독재'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물건을 팔기 위해 구구절절한 스펙을 나열했다. 이 화장품 성분이 어떻고, 임상 실험 결과가 어떻고. 하지만 지금 젠지(Gen Z)와 알파 세대를 움직이는 건 그런 논문 같은 팩트가 아니다. 그들이 추종하는 인플루언서나 디렉터가 툭 던지는 한마디, 혹은 무심하게 찍어 올린 사진 한 장이다.
예를 들어보자. 최근 가장 핫한 브랜드들의 인스타를 보면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제품에 대한 설명은 없고, 알 수 없는 추상적인 이미지나 기괴한 영상만 올라온다. 댓글로 "이게 무슨 뜻인가요?"라고 물어보면 답도 안 해준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불친절함에 매료된다. "내가 이해 못 하는 걸 보니 뭔가 대단한 게 있나 보다"라고 착각하거나, "이런 난해함을 이해하는 나"에 취하고 싶어 한다.
설명을 생략한다는 건, 자신의 취향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그 확신을 동경한다. 자기 인생 하나도 결정 못 해서 쩔쩔매는 현대인들에게, "이게 정답이야"라고 단언하는 카리스마적 리더는 구세주나 다름없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그랬고,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그렇고, 지금 패션계를 주름잡는 디렉터들이 그렇다. 그들은 소비자의 니즈를 묻지 않는다.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소비자는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냥 자신들이 만든 세계를 던져주고, "들어오든가 말든가"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그 세계의 시민이 되기 위해 줄을 선다.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철저한 엘리트주의고, 취향의 제국주의다. 하지만 우리는 기꺼이 식민지가 되길 자처한다. 왜냐고? 그 독재자의 취향이 내 취향보다 훨씬 세련되고 우월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니까. 내 안목을 믿느니 저 사람의 안목을 맹신하는 게 실패 확률을 줄이는 길이니까. 비겁하다고? 아니, 이건 생존 전략이다.
문을 닫아라, 그래야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니까
독재자는 대중과 섞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만의 성을 쌓고, 선택된 소수만 그 성 안으로 들여보낸다. 여기서 '폐쇄형 커뮤니티'가 탄생한다. 인터넷의 초기 정신은 '개방'과 '공유'였다. 정보는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진짜 고급 정보, 진짜 핫한 트렌드는 구글 검색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비공개 디스코드 서버, 유료 뉴스레터, 초대장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오프라인 살롱에서 유통된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정보는 정보로서의 가치가 없다. 그건 그냥 소음이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을 갈망한다. 문을 걸어 잠글수록 안달이 난다. 클럽하우스가 반짝 떴던 이유도, 명품 브랜드들이 VIP 전용 프라이빗 룸을 확대하는 이유도 같다. "당신은 선택받았다"는 그 느낌.
이 폐쇄성은 커뮤니티 내부의 결속력을 미친 듯이 강화한다. 밖에서는 10억 개의 콘텐츠가 똥오줌 못 가리고 섞여 있지만, 우리 성 안에는 검증된 독재자(리더)가 엄선한 1급수 정보만 흐른다. 잡음이 없다. 트롤도 없다. 광고도 없다. 오직 취향이 맞는 사람들, 리더의 철학에 동의하고 헌금을 낸(유료 구독을 한) 충성스러운 신도들만 있다.
이곳에서의 정보 전달 효율은 바깥세상과 비교가 안 된다. 리더가 "A 주식 사세요" 하면 산다. "B 영화 보세요" 하면 본다. 의심 비용이 0에 수렴한다. 바깥세상 사람들이 "저거 사기 아니야?"라고 떠들 때, 성 안의 사람들은 이미 수익을 실현하고 파티를 즐긴다. 폐쇄성은 정보를 썩게 만드는 게 아니라, 정보를 숙성시킨다. 정보가 제한된 곳이 오히려 가장 핫한 정보의 성지가 되는 아이러니. 이것이 새 시대의 정보 유통 공식이다.
기계가 떠먹여 주는 밥상을 엎어버린 사람들
재미있는 건, 이 흐름이 기술 만능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10년 넘게 알고리즘의 지배를 받아왔다. 유튜브가 추천해 주는 영상을 보고, 인스타그램이 보여주는 광고를 보고 샀다. 편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소름이 돋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계속 보여주는 '필터 버블'에 갇혀, 내가 점점 편협한 인간이 되어가는 걸 느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것들이 점점 뻔하고 지루해진다. 기계적인 예측 가능함. 거기엔 '의외성'이 없다.
그래서 '알고리즘 거부 운동'이 일종의 챌린지로 떠오르기도 한다. "AI 추천 끄기" 버튼을 누르는 건 디지털 시대의 독립 선언이다. 넷플릭스 추천 목록을 무시하고, 평론가가 쓴 종이 잡지를 읽고 영화를 고른다. 멜론 탑 100을 듣지 않고, 동네 레코드바 사장님이 틀어주는 낯선 재즈를 듣는다.
우리는 그렇게 차가운 계산보다 뜨거운 직관을 믿고 싶어 한다. AI는 "데이터상 이 노래를 좋아할 확률이 98%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인간 큐레이터는 "어제 비도 오고 애인이랑 헤어져서 기분이 그지 같았는데, 이 노래 듣고 소주 한 병 깠어. 너도 들어봐"라고 말한다. 우리는 후자에 끌린다. 왜? 거기엔 '맥락'이 있고 '감정'이 있으니까.
독재적 큐레이터가 숭배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알고리즘처럼 데이터를 분석해서 안전한 걸 내놓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직관, 경험, 때로는 편견까지 섞어서 아주 인간적인(그래서 때로는 위험한) 제안을 한다. "데이터는 모르겠고, 내 감이 이게 맞대." 이 비합리성이 역설적으로 인간성을 회복시킨다. 기계가 떠먹여 주는 미지근한 영양죽을 걷어차고, 셰프가 기분 내키는 대로 만든, 맵고 짜고 자극적인 요리를 먹겠다는 선언이다.
자유의지를 반납합니다, 제발 나를 통제해 줘
결론을 내리자. 우리는 지금 '자유의지의 피로 사회'에 살고 있다. "니 인생 스스로 결정해"라는 말이 칭찬이 아니라 저주처럼 들리는 시대다. 매 순간 선택을 강요받는 것에 지친 인간들은, 이제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반납할 대상을 찾는다. 그것이 종교든, 이념이든, 아니면 내가 팔로우하는 인플루언서든 상관없다. 나를 확신을 가지고 이끌어줄 '인간 가이드'가 필요하다.
이건 퇴행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존 본능이기도 하다. 정보의 해일 속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튼튼한 배를 가진 선장에게 올라탄 것이다. 그 선장이 독재자라 할지라도,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러니 만약 네가 이 시대에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혹은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면, 제발 "고객님, 무엇을 원하세요?"라고 묻지 마라. 고객은 모른다. 그냥 "이걸 하세요. 이게 당신에게 필요합니다"라고 명령해라. 그리고 그 명령에 쇳물처럼 단단한 확신을 담아라. 설명하지 말고 유혹해라. 선택지를 주지 말고 정답을 줘라. 사람들은 자유를 준 사람에게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통제해 준 사람에게 열광하고 숭배하니까.
이제 네가 선택할 차례다. 계속 자유라는 이름의 형벌 속에서 선택 장애를 겪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매력적인 독재자의 취향 제국으로 망명할 것인가. 물론, 이 칼럼을 읽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답을 알고 있겠지만.
3줄 요약
- 정보와 선택지가 10억 개로 늘어난 풍요의 시대,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라 결정 장애라는 고문을 당하며 '강력한 통제'를 갈망하게 되었다.
- 설명하고 설득하는 친절한 가이드보다, "그냥 이게 정답이야"라고 불친절하게 명령하고 선택지를 삭제해 버리는 '취향의 독재자'가 숭배받는다.
- 알고리즘의 뻔한 추천을 거부하고 인간적인 비합리성과 직관을 따르는 것이 힙한 문화가 되었으며, 대중은 기꺼이 자유의지를 반납하고 폐쇄적인 취향 공동체의 신민이 되기를 자처한다.
'MACHINE: EXPLO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 AI를 천재로 만드는 건 '자유'가 아니라 '감옥'이다 (0) | 2025.11.27 |
|---|---|
| AI가 멍청한 건 프롬프트 탓이 아니다. 욕심 탓이다. (0) | 2025.11.27 |
| 그 낡은 '타르볼'이 여전히 섹시한 이유? 유닉스 철학의 우아한 생존법 (0) | 2025.11.26 |
| AI 조련의 정석: 알고리즘이 아니라 심리학으로 승부하라 (0) | 2025.11.25 |
| 당신의 삽질이 유독 처절하게 끝나는 이유? XY 문제 (0) | 2025.11.25 |
| 플러그인 시스템의 딜레마: 확장성과 보안 사이 (0) | 2025.11.24 |
| 외계인과 대화하는 유일한 방법: JSON-RPC라는 공용어에 관하여 (0) | 2025.11.23 |
| CEO는 없다, 코드만 있을 뿐: DAO라는 기묘한 유토피아 (0) | 2025.11.23 |
|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그 우아하고 치열한 탱고 (0) | 2025.11.23 |
| 버그 바운티는 심리전이다. 담당자를 홀리는 '보고서의 미학' (0) | 2025.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