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3월 31일, 뉴욕의 아침 공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가웠지만 5번가에는 묘한 열기가 감돌았다. 부활절 퍼레이드는 뉴욕 사교계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였고, 수많은 인파와 취재진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기자들이 진정으로 기다린 것은 화려한 꽃마차나 악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며칠 전, "여성의 권리를 위한 역사적인 횃불 행렬이 있을 것"이라는 은밀한 제보를 받았다.

가장 혼잡한 시간, 세련된 코트와 모자를 쓴 열 명 남짓한 젊은 여성 무리가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사전에 약속된 신호에 맞춰 멈춰 섰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수백 개의 시선이 그들에게 꽂혔다. 그들은 침착하게 핸드백을 열었다. 그들이 꺼낸 것은 립스틱이나 거울이 아니었다. 초록색 포장의 '럭키스트라이크' 담배였다. 치익, 성냥 긋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여성들이 일제히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뿜는 순간, 카메라 플래시가 번개처럼 터졌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여성이 공공장소, 그것도 개방된 거리에서 흡연하는 것은 단순한 비매너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덕적 타락이자 남성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는 금기 중의 금기였다. 하지만 그날 그들의 눈빛은 타락한 여자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잔 다르크처럼 비장했다. 다음 날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전 미국의 신문 1면은 이 충격적인 사진으로 도배되었다. 헤드라인은 자극적이었다. "자유의 횃불(Torches of Freedom), 여성이 흡연의 금기를 깨다."

이 사건 이후 미국 전역의 여성들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담배는 더 이상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기호식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성과 동등해졌다는 증표였고, 억압된 구시대의 관습을 태워버리는 해방의 불꽃이었다. 판매량은 수직 상승했다. 아메리칸 토바코 회사의 매출 그래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환호했고, 여성들은 거리에서 당당하게 담배를 물었다.

하지만 이 감동적인 '해방의 드라마'에는 끔찍한 반전이 숨어 있었다. 그 자리에 섰던 여성들은 자발적인 운동가가 아니라 돈을 받고 고용된 모델들이었다. 기가 막힌 앵글로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들 역시 미리 섭외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지휘한 것은 여성 인권과는 눈곱만큼도 상관없는, 담배 회사의 사장 조지 힐과 그의 의뢰를 받은 한 명의 천재적인 전략가였다. 당신이 느낀 그 뜨거운 가슴 벅찬 해방감, 사실은 누군가의 연말 보너스를 위한 무대 장치였던 셈이다.

프로이트의 조카, 대중의 무의식을 해킹하다

이 거대한 사기극의 총감독은 'PR(Public Relations)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다. 그의 이름은 낯설지 몰라도 그의 성은 익숙할 것이다. 그는 바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친조카다. 삼촌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욕망과 트라우마를 분석해 환자를 치료하려 했다면, 조카 버네이스는 그 무의식을 이용해 대중을 조종하고 상품을 팔아치우는 법을 연구했다.

버네이스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는 대중을 '보이지 않는 정부(Invisible Government)'에 의해 조종되어야만 질서가 유지되는,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인 집단으로 규정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프로파간다》에서 이렇게 썼다. "대중의 관습과 의견을 의식적이고 지능적으로 조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요소다." 섬뜩하지 않은가?

아메리칸 토바코의 사장 조지 힐이 버네이스를 찾아와 "여성들이 담배를 피우게 해 달라"고 의뢰했을 때, 버네이스는 단순히 "담배 맛이 좋다"거나 "가격이 싸다"고 광고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삼촌의 이론을 빌려 정신분석학자 A.A. 브릴에게 자문을 구했다. "여성에게 담배란 무엇인가?" 브릴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여성에게 담배는 '남근'의 상징이다.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남성의 권력에 대한 선망(Penis Envy)을 해소하고 그들과 동등해지려는 무의식적 욕구의 표출이다."

버네이스는 무릎을 쳤다. 그는 즉시 '담배'라는 상품에서 '니코틴'이라는 물질적 속성을 지워버렸다. 대신 그 위에 '자유'와 '해방', '권력'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덧씌웠다. 그는 뚱뚱해지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를 자극하기 위해 "사탕 대신 럭키를 집으세요(Reach for a Lucky instead of a sweet)"라는 슬로건을 만들었고, 날씬함이 곧 자기 관리이자 현대 여성의 미덕이라는 인식을 심었다. 사람들은 담배를 피움으로써 자신이 쿨하고, 독립적이며, 날씬한 신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소비하게 된 것이다. 버네이스의 손끝에서 상품은 단순한 물건을 넘어, 자아를 완성하는 도구로 둔갑했다. 이것이 바로 현대 마케팅의 시초이자, 우리가 매일같이 당하고 있는 '욕망의 연금술'이다.

욕망은 어떻게 거세되고 포장되는가

버네이스의 유산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 더욱 교묘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진화했다. 기업은 더 이상 제품의 기능을 나열하며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당신의 가장 깊숙한 결핍과 불안을 파고든다. 외로움, 인정 욕구, 도덕적 우월감, 심지어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반항심까지도 마케팅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을 보라. 찢어진 청바지, 로고가 크게 박힌 후드 티, 낡은 듯한 빈티지 스니커즈. 당신은 이것을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혹은 기성세대의 딱딱한 정장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 입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저항 패션'조차 거대 의류 기업의 기획 회의실에서 탄생한 상품이다. 펑크(Punk) 록이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은 체제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지금 백화점에는 징이 박힌 가죽 재킷이 수백만 원에 팔린다. 혁명의 아이콘인 체 게바라의 얼굴은 티셔츠와 머그잔, 에코백에 인쇄되어 자본주의가 가장 사랑하는 베스트셀러 로고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자신을 공격하는 이념조차 흡수하여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괴물 같은 소화력을 지녔다. 이를 '반항의 상품화(Commodification of Dissent)'라고 부른다. 당신이 친환경 에코백을 메며 느끼는 그 도덕적 우월감, 한정판 스니커즈를 신으며 느끼는 그 특별한 소속감, 최신형 스마트폰을 사전 예약하며 느끼는 그 트렌디함. 그 모든 감정은 사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공산품이다.

기업은 당신에게 물건을 판 것이 아니다.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얻게 될 '더 나은 나', '개념 있는 나', '남들과 다른 나'라는 환상을 판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욕망의 전이(Association)'라고 부른다. 제품 자체와는 아무 상관 없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제품과 연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이가 일어나는 순간, 당신의 이성적인 방어막은 무력화되고 지갑은 열린다. 우리는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마케터가 주입한 꿈을 사고 있다.

알고리즘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독재자

과거에는 TV나 신문 광고가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던졌다. 하지만 지금은 훨씬 더 은밀한 독재자가 우리를 지배한다. 바로 알고리즘이다. 당신은 오늘 유튜브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인스타그램 탐색 탭에는 어떤 사진이 떴는가? 당신은 내가 주체적으로 콘텐츠를 선택했다고 믿겠지만, 사실은 알고리즘이 당신의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 가장 자극적이고, 당신의 취향에 딱 맞는(정확히는 당신의 편향을 강화하는) 것들만 골라서 떠먹여 준 것이다.

우리는 '나다움'을 찾기 위해 소셜 미디어를 한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곳은 가장 획일화된 욕망이 재생산되는 공장이다. 모두가 비슷한 '핫플레이스'에서, 비슷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비슷한 필터를 입혀 올린다. '좋아요'의 개수가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성적표가 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라캉이 지적한 이 비극이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곳이 바로 당신의 스마트폰 속이다.

버네이스가 "담배를 피우면 자유로운 여성"이라는 공식을 만들었듯, 현대의 인플루언서 마케팅은 "이것을 사면 힙한 사람"이라는 공식을 끊임없이 주입한다. 그들은 당신에게 친근한 언니, 형, 친구의 탈을 쓰고 다가온다.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산)"이라며 진정성을 강조하지만, 그 이면에는 치밀한 협찬 계약과 뒷광고가 도사리고 있다. 당신이 그들을 보며 느끼는 친밀감조차 자본화된 감정 노동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알고리즘과 마케터가 설계한 거대한 미로 속을 헤매면서, 스스로 길을 찾고 있다고 착각하는 실험실 쥐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쥐여준 라이터를 던져버려라

우리는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신분제도 없고, 직업 선택의 자유도 있으며, 마트에는 수만 가지 상품이 진열되어 있다. 하지만 당신의 그 '원함(Want)' 자체가 학습된 것이라면 어떨까? 당신이 정말로 그 가방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가방을 든 모델의 당당한 태도와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원하는 것인지 자문해 보라.

진정한 자유는 소비를 통해 획득되지 않는다. 무엇을 사느냐가 당신을 정의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자유는 역설적으로 '소비하지 않을 자유'다. 남들이 모두 든 횃불을 나도 들어야만 뒤처지지 않는다는 불안감,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공포. 그것이 바로 그들이 노리는 급소다.

버네이스의 '자유의 횃불'은 100년 전의 낡은 에피소드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쇼핑 카트 안에서, 당신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제 그만 당신 손에 들린 그 횃불을 냉정하게 내려다보라. 그것은 당신의 앞길을 밝히는 진리의 빛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배를 불리기 위해 당신의 시간과 돈을 태우는 심지인가?

'나다움'을 찾기 위해 카드를 긁는 행위를 멈추는 순간, 비로소 진짜 당신의 삶이 시작될 것이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욕망의 각본대로 연기하는 엑스트라의 삶을 거부하라. 진짜 자유는 남들이 쥐여준 라이터를 던져버리고,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내 발로 뚜벅뚜벅 걸어갈 용기에서 나온다. 그 어둠 속에서 당신이 스스로 발견한 아주 작은 불빛만이, 진짜 당신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