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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궤적을 가두는 모래, 혹은 그 이상

하루를 쉼 없이 쪼개는 디지털 시계 옆에 작은 모래시계를 두는 일은 이제 낭만적 취향처럼 보인다. 손안에 스마트폰이 들어온 뒤로 분침과 초침도 잘 안 보는데 하물며 모래시계라니.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래시계는 단순한 골동품이 아니라 독특한 물리적 매개체로서 가치가 높다. 투명한 유리관 안을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가루 입자는 사실 천연 모래보다 균일하게 가공된 유리 비드나 금속 분말일 때가 많다. 균등한 흐름을 위해 습기를 흡수하기 쉬운 자연 모래 대신 정교하게 처리한 인공 입자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고대부터 이어온 전통이라 해서 고집스럽게 사막이나 광산에서 채취한 모래만 담아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사람들은 왜 모래시계에 정교함을 요구했을까. 항해 시대에는 분 단위가 생존과 직결되었다. 폭풍우가 치는 바다 위에서 항해사들은 모래시계를 돌려가며 배의 위치를 짐작했다. 만약 습기를 머금은 모래가 목을 막아버리면, 중요한 계산이 틀어질 수 있었다. 누군가의 생사는 그러한 작고 균일한 입자가 끊김 없이 흘러내리는 데 달려 있었다. 모래시계의 실용성은 인간이 인식하는 시간의 틀을 변화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현대에 이르러 전자 시계와 스마트 기기가 모든 걸 대체했어도 직관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는 점에서 모래시계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의료나 화학 실험실에서도 모래시계를 의외로 활용한다. 전자파를 발생시키면 안 되는 환경, 전원이 없는 공간, 타이머가 지극히 단순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래시계는 무척 유용하다. 병원에서 수액이 떨어지는 속도를 정확히 맞출 때나, 화학 물질이 혼합되는 반응 시간을 고정할 때 모래시계를 사용하기도 한다. 보이는 것보다 훨씬 섬세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기술적 낙후가 아니라 오히려 기술적 대안으로 평가받는 경우다. 무중력 환경에서 모래시계를 실험하는 NASA의 시도 역시 흥미롭다. 인공위성이나 우주정거장 안에서 가루가 어떻게 분산되고 얼마나 일정하게 흐르는지 파악하기 위해 우주비행사들은 중력을 거스르는 모래시계를 살펴보고 있다. 굳이 전자장치가 아닌 모래시계를 통해 데이터 수집을 시도한다는 점이 때론 과거가 미래로 이어지는 징검다리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서서히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며, 디지털 시계가 주지 못하는 감각을 되살린다.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초침 대신 작은 알갱이들이 허공을 통과해 아래로 차곡차곡 쌓여 가는 풍경은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준다. UX 분야에서도 모래의 흐름이 주는 안정감에 주목한다. 클릭 후 기다리는 로딩 화면에 모래시계 아이콘이 뜨면, 아무리 짧은 순간이어도 소소한 휴식감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어쩌면 모래시계는 인간이 시간을 보는 방식이나 시간을 체감하는 방식을 우아하게 보여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재료의 혁신, 습기를 피하는 알갱이의 비밀

시중에서 모래시계라고 부르는 물건 중 상당수에는 사실상 모래가 없다. 어떤 제품은 더 단단한 금속 분말이나 세라믹 가루를 쓰고, 또 어떤 건 투명한 유리 비드로 가득 채운다. 스틸이나 티타늄 같은 금속 분말은 열이나 압력에 안정적으로 견디고 심지어 무게감까지 있어 흐름이 일정하게 유지되기 쉽다. 유리 비드는 습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아서 실험실에서 일정 시간을 측정할 때 애용된다. 달걀껍질을 곱게 갈아 쓰는 시도도 있었는데 자연 분해가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친환경 소재로 주목받았었다.

반대로 진짜 모래를 쓰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바닷가나 사막에서 직접 채취한 모래는 입자 크기가 제각각이어서 지나치게 빨리 흐르거나 특정 지점에서 걸릴 위험이 크다. 게다가 모래는 습기를 곧잘 머금는다. 장마철이나 습기가 가득한 실내에서는 모래가 서로 뭉쳐 덩어리 지면서 막히기 쉽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수차례 세척과 건조, 열처리, 입자 연마 과정을 거치면 그제야 정제 모래라는 이름으로 어느 정도 균일성을 확보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자연 입자를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천연 모래의 낭만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입도를 고르게 걸러내고, 실리콘 계열 코팅으로 표면을 매끄럽게 만든 뒤 내부에 탈습제를 넣으면 제법 안정적인 흐름을 보여준다. 이런 모래시계는 모래 본연의 색감과 촉감을 살려 인테리어 오브제로서 매력을 발산한다. 예술가들은 약간의 불균일마저 모래시계의 정체성이라 보며 흐름이 예측 불가해지는 순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예측불가능성과 균일성 사이에서 어디쯤에 포지셔닝하는가에 따라 모래시계의 기능과 예술성이 갈린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에는 진주가루나 산호가루를 넣어 왕실 장식품처럼 만들기도 했다. 그 속에서 시간의 흐름보다는 아름다움 자체가 더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새로운 차원, 모래시계가 초대하는 미래

모래시계가 마주할 미래는 의외로 첨단 과학기술이 뒷받침 한다. 빛과 음성 혹은 다른 물리량과 융합해 스마트 모래시계를 만들려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정전기 방지 코팅을 입힌 금속 알갱이 위로 약한 전류를 흘려 실시간 흐름 패턴을 센서가 인식하게 하는 방식이 연구 중이기도 하다. 그런 데이터를 분석하면 입자 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에서 나오는 패턴을 예측하는 AI 모델을 훈련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리적으로 흩날리는 입자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불규칙성을 차세대 예측 알고리즘의 학습 재료로 삼는 것이다. 과거 해시계나 물 시계가 과학과 예술, 천문학의 융합점이 되었던 것처럼 모래시계 역시 미래에도 융복합의 매개체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무중력 우주정거장 안에서 인공 중력을 흉내 낸 회전식 모래시계도 연구되고 있다. 지구 중력에 익숙한 우주비행사가 거친 외부 행성 표면에 착륙했을 때, 그들의 시간 감각은 상당 부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 혼란을 조금이라도 안정시키고 쉽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물리적 시간을 보여주는 장치가 필요하다. 전자 기기 역시 풍부하지만, 충전이 필요하고 전자파 간섭이 생길 수 있으니 모래시계 형태는 오히려 훌륭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서서히 흩어지는 입자를 바라보며 낯선 중력을 실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래시계는 사소해 보이지만 사람의 감각과 과학기술의 경계를 잇는 독특한 오브젝트로서 재발견되고 있다. 세상은 더 빠르고 정확한 디지털화로 질주해 가는데, 그 와중에 부서지기 쉬운 유리관 속에 담긴 작은 알갱이가 만들어내는 흐름이 은근한 안도감을 준다. 균일해야 하지만 약간의 오차가 묻어나는 물리적인 입자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다. 때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운 혁신을 품기도 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간, 손에 쥘 수 있는 흐름, 그리고 우주로 뻗어나갈 모래시계가 어디까지 진화할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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