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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펀지 같은 어린 아이의 뇌

붉게 물드는 노을을 보는 아이가 호기심에 가득 차 질문을 퍼붓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왜 하늘은 붉어지는가, 구름은 어디로 가는가, 태양은 언제까지 뜨거운가. 아이의 뇌는 짧은 순간에 스펀지처럼 정보를 흡수하고 또 흘려보낸다. 마치 빗속에서 종이컵을 들고 서 있으면 물이 금세 넘치듯이 아이의 뇌 안에는 수많은 시냅스 연결이 동시에 폭발해 정리 없이 쌓인다. 학자들은 이 현상을 두고 시냅스 가지치기 전 단계라고 부른다.


뇌가 모든 자극을 빠르게 잡아채는 덕에 아이는 새로운 단어나 개념을 놀라울 정도로 쉽게 배운다. 하지만 그만큼 유지하기도 힘들다. 발가락으로 종이비행기를 접는 법을 익혔다고 해도 며칠 뒤에는 완벽히 잊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어른들은 이 과정을 그저 어린아이니까라는 식으로 간단히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뇌 발달의 복잡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 중 하나다.


결국 너무 많은 문이 열려 있으면 바람이 자유로이 드나들면서 물건이 쉽게 흩날리는 것과 같다. 어린 뇌의 폭발적 학습 속도는 이러한 개방성에서 비롯되지만 의미 있는 정보를 오래 붙잡아둘 장치는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순식간에 무언가를 배워도 그것을 내재화하려면 반복적으로 복습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그 복습은 단조로운 연습이지만 사실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과정은 놀이와 호기심을 결합한 의미화 과정이다.


아이들이 특정 게임이나 그림에 몰입할 때 보이는 몰두는 어른의 기준에서 보면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 그 순간이야말로 의미에 대한 정리정돈이 일어나는 때다. 가령 색깔 맞추기 블록을 조립하며 기쁨을 느끼면 그 뇌 속에는 시각·촉각·감정이 뒤섞여 한데 엮인다. 이런 식으로 ‘의미’가 생기면 시간이 흐른 뒤에도 해당 경험을 오랫동안 기억한다.


아이의 뇌가 빠르면서 허무하게 잊어버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너무 많은 스위치를 동시에 켜 둔 상태에 가깝다. 뇌가 과분하게 열려 있어서 쏟아지는 입력이 많고, 그중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아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른다. 그렇기에 어른들은 무언가 하나하나를 꼭 주입하기보다 아이가 스스로 호기심을 붙들고 의미를 생성할 수 있도록 열린 장면을 제시해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성숙한 뇌의 축적과 합리적 선택

나이가 들며 머릿속 지식과 경험이 점차 쌓이기 시작하면 뇌는 어지러운 창고에서 견고한 자료실로 변모한다. 무엇이 값지고 무엇이 무의미한지 대략적 구분이 생기고 청년기부터 중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곁들여 그 구분은 더욱 선명해진다.


특히 성인기 이후로 축적된 경험량은 주관적 판단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토대가 된다. 하룻밤 사이에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직관이 무르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숙련된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몇 가지 묻고도 빠르게 질병 가능성을 짚어내는 경우가 있다. 한편 수치적으로 빠른 연산 능력은 20대 무렵이 절정이라고 하지만 다채로운 경험과 축적된 상황 인식은 그 속도보다 한 단계 높은 정확한 직관을 제공한다.


이렇게 축적된 직관과 지식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정교해지지만, 한편으로는 실행력이 감소하는 부분도 있다. 정보를 많이 쌓아두었어도 막상 그 정보를 즉각적으로 호출하고 실행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현상이다. 도서관 서가에 훌륭한 책은 잔뜩 쌓여 있으나 어떤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헷갈려서 오래 헤매는 상황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이런 느림이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사회적 상황에서 노년기나 중년기의 뇌는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많은 정보를 인과관계로 연결하고 위기 상황에서도 지난 경험을 교차 검토하여 적합한 결정을 내릴 확률이 높아진다. 특정 사실 하나만을 빠르게 기억해내는 것은 조금 어려워졌어도 다양한 사실들을 유기적으로 얽어 의사결정을 내리는 능력, 즉 지혜가 빛을 발하는 시점이다.


의미가 주도하는 뇌의 방향성

결국 뇌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정보의 의미다. 단순히 입력되는 지식은 구름처럼 흩어지기 쉽다. 그러나 개인의 경험과 감정, 가치관이 스며든 지식은 내 안의 뿌리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갈수록 노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고 해도 충분히 반추하고 재정립한 정보는 더욱 단단하게 정착한다.


아이는 속도로 앞서고 어른은 축적된 양에 있어서 유리하며 노인은 그 축적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결정을 내리는 데서 강점을 갖는다. 이 과정을 통틀어 가장 결정적인 열쇠는 각 시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의미화를 돕는 작업이다. 외부 자극이 입력되면 곧바로 반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과거의 맥락이나 가치, 언어 등을 동원해 해석하려는 능력이 발달할수록 기억과 판단의 질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삶 전체는 끊임없는 의미 확장의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떠오르는 사건들을 곱씹고, 타인의 말과 내 경험을 맞춰보며, 거기에 딸린 감정을 스스로 정의하는 연습을 거듭할수록 뇌는 더욱 단단하게 변화한다. 정보 처리 속도는 예전 같지 않을지 몰라도 그 속에서 얻어내는 통찰과 방향성은 오히려 더 향상된다.


무심코 흘려버리면 스쳐 지나갈 외부 자극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순간 뇌는 한층 성숙해진다. 때로 느리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해도 그 끝에는 단순 정보 이상의 삶의 무늬가 새겨진다. 아마도 이것이 인간의 뇌가 지니는 가장 매력적인 속성일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지식을 넘어 지혜를 추구해왔고 뇌가 계속해서 의미를 찾아가는 한 그 과정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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