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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9시,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무실 공기는 미묘하게 뒤틀린다. 탕비실에서 커피 향을 맡으며 주말에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늘어놓던 대화 소리가 뚝 끊기고, 모니터 뒤에 숨어 멍하니 뉴스 헤드라인을 훑던 시선들이 일제히 한곳을 향한다.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면 약속이나 한 듯, 혹은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나머지 사람들도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선다. 뻣뻣한 침묵을 깨고 선창이 시작된다. "우리는!" 그 순간, 당신의 입술은 뇌의 명령을 거치기도 전에 이미 움직이고 있다. "최고다!" "우리는!" "할 수 있다!" "혁신!" "도전!"

이 기이하고도 익숙한 풍경은 서울 테헤란로의 마천루부터 지방 공단의 조립 라인까지, 장소와 업종을 불문하고 매일같이 복제되어 재생된다. 만약 지구에 처음 도착한 외계인이, 혹은 인류학자가 이 장면을 목격한다면 무엇이라 기록할까. 아마도 그들은 이것을 업무의 시작이 아닌, 기묘한 부족의 제의(Ritual)나 사이비 종교의 집회 현장으로 분류할 것이다. 이토록 낯선 풍경 속에서 당신은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저 습관처럼, 혹은 생존을 위한 보호색처럼 영혼 없는 소리를 뱉어낼 뿐이다. 입으로는 "열정"을 외치지만 눈동자는 죽은 물고기처럼 탁한 채로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무심코 행하는 그 단순하고 지루한 반복 속에 얼마나 치밀하고 섬뜩한 심리적 기제가 숨겨져 있는지 당신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이것은 단순한 체조도, 밤새 굳은 몸을 풀기 위한 스트레칭도, 업무 시작을 알리는 알람도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뇌 신경망을 재배선하고, 당신이라는 자아를 해체하여 조직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완벽한 부속품으로 끼워 맞추기 위해 설계된 아주 정교한 '의식(Ritual)'이다. 우리는 왜 아침마다 소리를 지르는가. 그리고 그 행위는 우리에게 어떤 흉터, 혹은 문신을 남기는가. 이 글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그 아침의 풍경을 해부하는 서늘한 메스다.

뇌의 항복 선언과 신경가소성의 덫

종교가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난해하고 복잡한 교리에 있지 않다. 성경이나 불경을 한 글자도 읽지 못하는 사람도 독실한 신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매일, 매주, 매년 반복되는 기도와 예배라는 형식, 즉 '의식의 반복'에 있다. 인간의 뇌는 본질적으로 반복에 취약하다. 아니,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뇌는 반복되는 정보를 '진실'로, 혹은 '생존에 중요한 정보'로 받아들이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이것은 에너지 효율성을 위한 뇌의 생존 전략이다. 매번 들어오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처음 입사했을 때를 떠올려 보라. "우리는 가족이다"라거나 "고객은 신이다" 같은 구호를 외칠 때 느꼈던 그 낯간지러움과 거부감을. 하지만 열 번, 백 번, 천 번을 반복하면서 그 거부감은 마모된다. 이것은 단순한 익숙함이 아니다. 신경과학에서 말하는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의 원리가 작동한 결과다. 뇌 속의 신경세포들은 자주 함께 활성화될수록 서로 더 강력하게 연결된다. 매일 아침 특정 단어와 문장을 반복해서 뱉어내고 듣다 보면, 뇌는 그 문장과 관련된 회로를 물리적으로 강화한다. 마치 숲속에 처음에는 길이 없었지만, 매일 같은 곳을 밟고 지나다 보면 오솔길이 생기고 나중에는 고속도로가 뚫리는 것과 같다.

이 과정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비판적 사고의 완전한 마비다. 아침 조회 시간에 멍한 눈으로 기계적으로 박수를 치고 구호를 외치는 당신의 뇌 상태를 fMRI로 찍어본다면, 논리적 판단과 비판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활성도가 현저히 떨어져 있을 것이다. 이성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그 틈을 타서, 반복된 메시지는 검문검색 없이 무의식의 영역으로 직행한다. 마치 최면술사가 단조로운 목소리와 반복적인 동작으로 피험자를 트랜스 상태로 유도한 뒤 암시를 심는 것과 소름 끼치게 닮아 있다. 조직은 매일 아침의 의식을 통해 구성원들을 집단 최면 상태로 몰아넣는다. 이것이 기업이 그토록 아침 조회와 구호 제창, 사가 제창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다. 그들은 당신의 노동 시간뿐만 아니라, 당신의 무의식과 신념 체계까지 소유하고 통제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반복된 의식은 개인의 정체성을 희석시키고 집단 정체성을 강화한다. 모두가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리듬으로 구호를 외치는 순간, '나'라는 고유한 개인은 증발하고 '우리'라는 거대한 덩어리만 남는다. 군대가 제식 훈련에 그토록 많은 시간을 쏟는 이유와 정확히 일치한다. 오와 열을 맞추고 손을 흔드는 각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돌출된 자아는 깎여나가고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균질한 세포가 된다. 회사라고 다를까. 아침마다 반복되는 구호 제창은 양복 입은 군인들을 찍어내는 제식 훈련의 소프트웨어 다른 버전일 뿐이다. 당신이 구호를 외치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고유한 취향과 비판적 지성을 가진 개인이 아니다. 그저 조직의 목표라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 돌진하는 거대한 유기체의 촉수 하나로 전락한다. 그리고 무서운 것은, 뇌가 이 상태를 점차 편안하게 느끼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소속감'이라는 달콤하고도 위험한 마약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신성한 시간과 불경한 자의 탄생

모든 종교와 고대 부족 사회에는 '성역(Sanctuary)'이 필요하다.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신성한 공간, 그리고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시간. 조직은 평범한 회의실이나 작업장을, 그리고 매일 아침의 조회 시간을 '성역화'함으로써 그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격상시킨다.

예를 들어보자. 일본의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나 수많은 일본 기업들은 청소를 경영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들에게 청소는 단순히 환경을 깨끗이 하는 위생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을 닦고 정신을 수양하는 종교적 수행이다. 이렇게 의미가 부여되면, 청소는 더 이상 귀찮은 잡무가 아니라 숭고한 의식이 된다. 아침 조회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업무 공지사항을 전달하는 효율적인 미팅이 아니다. 전 사원이 한자리에 모여 조직의 비전(교리)을 공유하고 서로의 에너지(신앙심)를 확인하는 신성불가침의 예배 시간으로 포장된다.

이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내부자'와 '외부자'의 구분, 그리고 '신실한 자'와 '불경한 자'의 낙인찍기다. 의식이 신성해질수록, 그 의식에 참여하는 태도는 충성심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다. 모두가 경건하고 열정적인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는데, 혼자서 짝다리를 짚고 있거나 입만 벙긋거리는 사람은 순식간에 눈에 띈다. 그는 단순히 게으른 직원이 아니다. 그는 신성한 의식을 모독하는 '불경한 자'가 된다.

조직은 이런 이단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굳이 인사팀이 나서서 징계할 필요도 없다. 집단의 싸늘한 시선, 무언의 압박, 미묘한 따돌림이라는 훨씬 더 가혹하고 효과적인 형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이 좀 달라." "애사심이 부족해." "분위기 망치네." 이런 수군거림은 당사자를 견딜 수 없는 고립감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이것은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이나 종교적 파문과 메커니즘이 동일한 사회적 처형이다. 집단에서 배제될지도 모른다는 원초적인 공포는 인간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굴복시킨다.

성역화된 루틴은 조직의 규율을 내면화(Internalization)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상사가 일일이 지시하고 감시하는 것은 하수다. 진정한 통제는 감시자가 없어도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의식에 참여하지 않거나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구성원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간수가 된다. 제레미 벤담이 설계하고 미셸 푸코가 분석한 '파놉티콘(Panopticon)'의 감옥이 사무실에 그대로 구현되는 것이다. 당신의 옆자리 동료는 당신이 구호를 얼마나 크게 외치는지, 박수를 얼마나 열렬히 치는지 지켜보는 잠재적 감시자다. 이 숨 막히는 상호 감시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신은 더욱더 과장되게, 더욱더 열렬히 의식에 참여하게 된다. 진심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연기(Acting)라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연기가 실제가 되는 순간이 온다. 가면이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 즉 페르소나가 자아를 잠식하는 순간이다.

자기기만이 만들어내는 충성심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1950년대에 제안한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이론은 조직의 의식이 인간의 심리를 어떻게 조작하는지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탁월하고 섬뜩한 도구다. 인간은 자신의 신념(태도)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극심한 심리적 불편함, 즉 부조화를 느낀다.

자, 상황을 가정해보자. 당신은 이 회사가 끔찍하게 싫다. 상사는 무능하고 꼰대 같으며, 연봉은 쥐꼬리만 하고, 야근은 밥 먹듯이 시킨다. 당신의 신념은 "이 회사는 쓰레기다"이다. 그런데 매일 아침 당신은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쳐야 한다. "나는 이 회사를 사랑한다! 우리는 세계 최고다! 나의 열정을 바친다!" 여기서 당신의 태도(혐오)와 행동(찬양) 사이에 거대한 모순이 발생한다. 이 인지 부조화는 뇌에게 있어 고통이다. 이 불편함을 해소하고 평온을 되찾기 위해 당신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첫 번째 방법은 행동을 바꾸는 것이다. 구호를 외치지 않거나, 당장 사표를 던지고 회사를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논리적이고 정직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대출금, 카드값, 처자식, 그리고 불안한 취업 시장이 당신의 발목을 잡는다. 행동을 바꾸는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나 큰 비용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다.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행동은 이미 저질러졌고 돌이킬 수 없다. 그렇다면 그 행동에 맞춰 내 생각을 뜯어고치는 수밖에 없다. "사실 나는 이 회사를 꽤 좋아하는 게 아닐까?" "우리 회사의 비전이 그렇게 허황된 건 아니야, 나름 의미가 있어." "이 구호를 외치다 보니 왠지 활력이 도는 것 같기도 해." "상사도 알고 보면 인간적인 면이 있어." 뇌는 스스로를 속이기 시작한다. 비참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념을 수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심리적 생존 본능이다. 매일 아침 느끼는 자괴감과 모멸감, "나는 영혼을 팔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고통을 견디기 위해, 차라리 그 행위에 숭고한 의미를 부여하고 진심으로 믿어버리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롭기 때문이다.

조직은, 혹은 교활한 경영자들은 이 메커니즘을 본능적으로 혹은 학습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구성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먼저 행동하게 만든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라도 억지로 시킨다.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게 하고, 춤을 추게 하고, 감사 일기를 쓰게 한다. 일단 행동을 하게 만들면, 마음은 그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이 처음 입사했을 때 느꼈던 그 비판적 시각과 날 선 감각이 어느새 무뎌지고, 자연스럽게, 심지어 열정적으로 구호를 외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축하한다. 당신의 뇌가 수행한 인지 부조화 조정 작업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당신은 이제 조직이 주입한 가짜 신념을 당신의 진짜 신념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뇌의 완성이다. 고문이나 협박 없이도, 스스로 알아서 굴복하고 순응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조직이 노리는 궁극의 승리다. 당신의 영혼은 이미 잠식되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 패배를 '애사심' 혹은 '성숙한 적응'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할지도 모른다. 

신화가 된 선배들과 희망 고문

모든 종교와 국가에는 건국 신화와 기적을 행한 성인들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조직을 지탱할 '전설'을 필요로 한다. "저기 저 영업 본부장님 보이시지? 저분이 평사원 때는 매일 아침 남들보다 1시간 일찍 나와서 108배를 하셨대." "창업주님은 단돈 500원과 빗자루 하나로 이 거대한 공장을 일으켜 세우셨어." "불가능한 프로젝트를 밤샘 투혼으로 성공시킨 전설의 3팀 이야기를 아나?"

이런 류의 영웅담은 아침 조회 시간, 신입사원 연수, 회식 자리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유포되며 살이 붙는다. 이 이야기들은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조직의 의식과 고통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다. 이 전설들의 핵심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현재 우리가 행하는 이 비합리적이고, 고통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의식이 사실은 미래의 찬란한 성공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통과 의례'라는 것이다.

이 신화들은 현재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완벽하게 작동한다. 당신이 지금 겪는 부당함, 피로, 자괴감은 훗날 당신이 영웅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수업료이자 훈장으로 포장된다. 당신이 불만을 토로하려 하면 선배들은 말한다. "그분들도 다 겪으셨어. 너라고 못 할 거 없잖아?" "원래 성공하려면 미쳐야 하는 거야." 이 말 한마디면 모든 합리적인 문제 제기는 '나약함', '노력 부족', '요즘 애들의 끈기 부족'으로 치부된다.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급변하는 현재에도 유효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인으로서의 임원들. 그들은 존재 자체로 조직의 의식을 정당화하는 성물(Relic)이자 아이콘이다.

조직은 이러한 전설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일종의 판타지, 즉 헛된 희망을 심어준다. "나도 저 전설 속의 주인공처럼 열심히 이 의식에 참여하고, 시키는 대로 충성을 다하면 언젠가는 저 임원들처럼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비록 현실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 수천 명 중 한 명에 불과할지라도, 그리고 그 성공의 사다리가 이미 부러져 있을지라도, 조직은 그 희박한 가능성을 마치 확실한 미래인 양 믿게 만든다.

이것은 로또 당첨을 꿈꾸며 매주 복권을 사는 서민들의 심리와 비슷하다.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벼락같은 행운을 꿈꾸는 동안은 고달픈 현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직은 매일 아침 의식을 통해 그 복권을 긁게 만든다. "오늘도 꽝이지만, 내일은 당첨될 거야. 더 크게 소리 지르면 당첨 확률이 올라갈 거야." 그렇게 희망 고문 속에 당신의 청춘과 에너지는 소모되고, 조직은 당신의 그 에너지를 연료 삼아 굴러간다. 전설은 멀리서 볼 때만 아름답다. 가까이서 뜯어보면 그것은 '생존 편향(Survivorship Bias)'으로 점철된 기만극이다. 실패하고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삭제되고, 오직 살아남아 성공한 극소수의 이야기만이 진실인 양 포장된 것이다.

금기의 설정과 사회적 매장에 대한 공포

의식(Ritual)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통제력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짝을 이루어야 하는 개념이 있다. 바로 '금기(Taboo)'다. 하지 말아야 할 것, 만지지 말아야 할 것, 말하지 말아야 할 것. 원시 부족 사회에서 금기를 어기는 것은 곧 신의 저주나 죽음을 의미했다. 현대의 조직 내에도 수많은 금기가 존재하며, 이것들은 사규보다 더 무섭게 작동한다. 상사의 말에 토를 다는 것, 조회 시간에 딴짓을 하거나 하품을 하는 것, 회식 자리에서 상사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조직의 '의식'을 비웃거나 냉소적으로 대하는 것. 이것들은 십계명보다 더 엄격하게 지켜져야 할 불문율이다.

금기를 어긴 자에게 가해지는 처벌은 잔혹하다. 현대 사회에서 물리적인 태형이나 투옥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사회적 태형'은 더욱 교묘하고 집요해졌다. 은밀한 따돌림, 중요한 업무에서의 배제, 책상 빼기, 인사 고과의 불이익.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부적응자", "모난 돌"이라는 낙인이다. 이 낙인은 직장인에게 있어 밥벌이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무기다.

인간은 철저하게 사회적 동물이다. 수백만 년의 진화 과정에서 무리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맹수에게 잡아먹히거나 굶어 죽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우리의 유전자 깊은 곳에는 집단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본능적인 두려움이 각인되어 있다. 조직은 이 생물학적 공포를 인질로 잡는다. 그들은 당신이 의식에 참여하지 않으면 무리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시그널을 끊임없이 보낸다.

"너무 튀지 마.", "그냥 남들 하는 대로 해.", "중간만 가." 선배들이 건네는 이런 조언을 가장한 압박은 당신의 개성을 억누르고 조직의 무채색에 물들기를 강요한다. 금기는 이성적인 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영역이다.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저 "원래 그랬으니까", "분위기 망치니까", "윗분들이 싫어하니까"라는 이유로 금지된다. 이 불합리함을 참고 견디는 것 자체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는 과정으로 간주된다. 자신의 욕구와 이성을 억압하고 금기를 지키는 훈련. 이 훈련이 매일 반복되면 당신은 길들여진 양이 된다. 울타리를 넘어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하고, 목동의 휘파람 소리에 조건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순한 양 말이다.

뼈에 새겨지는 문화와 신체화된 복종

결국 문화는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비전과 미션이 적힌 액자가 벽에 걸려 있어도, 그것은 문화가 아니다. 입으로 외치고, 손으로 박수 치고, 발로 뛰는 신체적 행위를 통해 문화는 '근육 기억(Muscle Memory)'으로 저장된다. 매뉴얼에 적힌 '혁신'이나 '도전'이라는 글자는 공허한 잉크 자국에 불과하다. 하지만 매일 아침 목이 터져라 외치는 '혁신'은 실체가 된다. 비록 그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를지라도, 그 단어를 외칠 때의 심박수, 호흡, 성대의 떨림, 근육의 긴장은 몸에 남는다.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가 말한 '신체화(Embodiment)'가 일어나는 것이다.

조직이 진정으로 원하는 인재상은 똑똑한 비평가가 아니다. 우직한 실행가다. 머리로 따지고 분석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조직 입장에서 관리하기 골치 아픈 리스크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의심 없이 몸을 던지는 돌격대가 필요하다. 아침 조회와 구호 제창은 바로 그런 신체를 만들어내는 공정(Process)이다. 생각을 멈추고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훈련. 이 훈련이 거듭될수록 당신의 반응 속도는 빨라지고, 반대로 비판적 사고의 속도는 느려진다. 조건 반사적인 복종.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에 침을 흘리듯, 당신은 상사의 지시나 조직의 구호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자동인형이 되어간다.

이것을 그들은 '강한 조직 문화'라고 부른다. 일사불란함, 단결력, 추진력, 한 방향 정렬. 듣기 좋은 경영학 용어들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개인성의 말살과 전체주의적 통제를 포함한다. 한 번 뼈에 새겨진 의식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회사를 퇴사한 후에도, 낯선 곳에서 아침 9시만 되면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거나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리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조직이 당신의 몸과 뇌에 남긴 문신과도 같은 흔적이다. 보이지 않지만, 평생 당신을 옥죄는 사슬이다.

이제 다시 묻는다. 내일 아침, 당신은 또다시 구호를 외칠 것인가? 물론 그럴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튀어서 좋을 것 없다는 처세술을 당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당장 밥줄을 끊을 용기가 없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기억하라. 깨어 있어라. 당신이 외치는 그 구호가 당신의 생각은 아니라는 것을. 당신이 박수 치는 그 손이 당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그 자각마저 놓아버리는 순간, 당신은 정말로 그들의 것이 되고 만다. 의식에 참여하되, 의식에 잠식당하지는 말라. 그 서늘하고 냉소적인 거리두기(Distancing)만이, 조직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당신이라는 쇳덩이가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게 지켜줄 유일한 방열복이다. 부디, 당신의 영혼만은 그들의 제단에 바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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