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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 보라. 당신은 지금 수많은 유력 인사와 미디어의 카메라가 집중된 화려한 디너파티의 주인공이다.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와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던 연회장은 순식간에 살얼음판으로 변해버렸다. 당신이 과거에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 혹은 은밀하게 덮어두었던 비리가 누군가의 입을 통해 화두에 올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초리는 따갑고 질문은 예리한 칼날처럼 당신의 목을 조여온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고,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을수록 상황은 더욱 꼬여만 간다. 논리적으로 반박하려 할수록 상대방은 더 많은 증거를 요구할 것이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하려 하면 그것을 자백으로 받아들여 당신을 매장하려 들 것이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 당신이 상황을 단번에 뒤집고 이 지옥 같은 청문회장에서 탈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충격적인 행동은 무엇일까.

그 답은 당신의 품 속에 있다. 당신은 품 안에서 며칠은 묵혀 썩어 문드러진, 내장이 튀어나오고 악취가 진동하는 죽은 고양이 시체를 꺼내 든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혐오스러운 물체를 하얀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 중앙에 '쾅' 하고 내던진다. 그 순간 정적은 깨지고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세상에, 저게 뭐야? 고양이가 죽어있어!" 누군가는 구토를 하고, 누군가는 경악하며 사진을 찍어댈 것이다. 자, 이제 상황을 보라. 방금 전까지 당신의 횡령이나 불륜, 혹은 정책 실패를 따져 묻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다. 그들의 뇌리에는 오직 '식탁 위의 죽은 고양이'라는 기괴하고 충격적인 이미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 공학의 바이블이자 위기 관리의 가장 잔혹하고도 효율적인 기술, '죽은 고양이 전략(Dead Cat Strategy)'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고등 생명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팩트에 기반하여 정보를 처리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 투표하거나 소비한다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진화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대중의 뇌는 지극히 단순하고 말초적인 자극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원시 시대부터 인간의 생존을 결정지었던 것은 복잡한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눈앞의 맹수나 피 냄새 같은 즉각적인 위협과 자극이었다. 이러한 본능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인지 체계를 지배하고 있다.

인간의 주의력 한계와 인지적 병목 현상

인지과학에서는 이를 '주의력의 병목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뇌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컴퓨터의 CPU가 과부하 걸리면 작업 속도가 느려지거나 멈춰버리듯, 인간의 뇌 역시 두 가지의 거대한 이슈를 동시에 최상위 중요도로 처리하지 못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뇌는 생존 본능에 따라 더 강렬하고, 더 시각적이며, 더 본능을 자극하는 정보를 우선적으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폐기하거나 후순위로 미뤄버린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뇌 구조의 생물학적 한계다.

당신이 수천억 원의 분식회계를 저질렀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은 분명 사회적으로 중대한 범죄이며 논리적으로 파헤쳐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대중에게 회계 장부의 숫자는 지루하고 어렵다. 이때 당신이 테이블 위에 '죽은 고양이'를 던진다. 예를 들어, 경쟁 상대의 엽기적인 성적 취향을 폭로하거나, 유명 연예인의 마약 파티 사진을 유출하는 것이다. 복잡한 엑셀 파일과 피 묻은 고양이 시체. 대중의 눈과 귀가 어디로 쏠릴지는 자명하다. 뇌의 정보 처리 프로세스는 즉시 '회계 부정'이라는 지루한 데이터 처리를 중단하고, '엽기 스캔들'이라는 고자극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당신의 비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단지 대중의 관심사 폴더에서 '휴지통'으로 이동되었을 뿐이다.

죽은 고양이라고 해서 아무 이슈나 던진다고 통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대중의 심리를 파고드는 정교한 조건과 법칙이 존재한다. 식탁 위에 던져질 그 이슈는 반드시 논리적인 반박이 불가능할 정도로 기괴하거나, 인간의 가장 밑바닥 본능을 건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성(Sex), 돈(Money), 분노(Anger), 그리고 혐오(Disgust). 이 네 가지 요소는 인간의 뇌간을 직접 타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논리를 넘어서는 본능의 자극

만약 당신의 비리를 덮기 위해 "경쟁자도 비슷한 정책 실수를 했다"라고 주장한다고 치자. 이것은 하수 중의 하수다. 왜냐하면 여전히 '정책'과 '실수'라는 논리의 영역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두 사건을 비교하고, 경중을 따지고, 팩트 체크를 하려 들 것이다. 이는 당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대중의 이성 회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차원이 다른 충격을 던져야 한다.

예를 들어, 정치인의 뇌물 수수 의혹이 터졌을 때, 갑자기 유력 대권 주자의 숨겨진 사생아나 혼외자 문제가 터진다면 어떨까. 혹은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스포츠 스타의 이중적인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폭로된다면? 대중의 도파민은 폭발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라며 분노하고, 욕하면서도 그 자극적인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논리적 사고를 담당하는 전두엽은 마비되고, 감정과 본능을 담당하는 변연계가 활성화된다. 이 상태가 되면 당신의 복잡한 비리 혐의는 대중의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진다. 이것은 마술사가 관객의 시선을 속이는 트릭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마술사가 오른손으로 화려한 불꽃을 일으킬 때, 관객은 그 불꽃에 홀려 왼손이 비둘기를 꺼내는 것을 보지 못한다. 미디어 전략가들은 이 원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대판 흑마술사들이다.

언론과 미디어의 생리 또한 이 전략을 부추기는 공범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사는 진실의 수호자라기보다, 조회수(Traffic)와 시청률(Rating)을 먹고 사는 영리 기업에 가깝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더 중요한가'가 아니라 '무엇이 더 팔리는가'이다. 복잡한 권력형 비리 기사는 작성하기도 어렵고, 독자들도 끝까지 읽지 않는다. 하지만 자극적인 스캔들, 엽기적인 사건, 선정적인 폭로는 올리는 즉시 수만, 수십만 건의 클릭을 유도한다. 죽은 고양이가 식탁에 올라오는 순간, 모든 카메라는 그 혐오스럽지만 매혹적인 피사체를 찍기 위해 플래시를 터뜨린다. 기자들은 데스크의 압박에 못 이겨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아내기에 바쁘다. 그 사이 당신은 유유히 식당 뒷문으로 빠져나가면 된다. 대중과 언론은 당신이 사라진 줄도 모른 채, 죽은 고양이의 털 색깔이 검은색인지 흰색인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를 두고 밤새 열띤 토론을 벌일 테니까. 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냉소적인 전략인가. 도덕적 비난은 잠시지만, 승리와 생존은 영원하다는 마키아벨리적 사고방식이 이 전략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골든타임을 선점하라

하지만 명심하라. 아무리 끔찍한 고양이라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악취만 풍길 뿐 효과를 보지 못한다. 죽은 고양이를 던지는 타이밍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미 당신의 비리가 모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대중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뒤에는 늦다. 이슈는 선점하는 자의 것이다. 나의 치부가 드러나기 직전, 기자들이 냄새를 맡고 취재를 시작할 무렵, 혹은 의혹이 막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바로 그 '골든타임'에 더 큰 충격을 터뜨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평소에 경쟁자나 사회적 유력 인사들의 약점을 수집해두는 치밀함이 필수적이다. 정보는 곧 현대 사회의 핵무기다. 언제든 터뜨릴 수 있는 스캔들, 비디오, 녹취록 등을 비밀 금고 속에 차곡차곡 보관해 두었다가, 위기의 순간에 하나씩 꺼내 쓰는 것이다. "아껴두면 똥 된다"는 말은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 아껴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터뜨려야 나를 구하는 동앗줄이 된다. 그래서 정보기관이나 거대 미디어 그룹, 혹은 정치 공작팀이 무서운 것이다. 그들은 대중의 시선을 언제 어디로 돌려야 판을 뒤집을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에 필요한 '고양이 시체'들을 종류별로 구비하고 있다.

가끔 뉴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있을 것이다. "왜 하필 지금?"이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뜬금없이 철 지난 연예인의 과거 학교 폭력 폭로가 연이어 터지거나, 대형 건설사의 부실 공사 문제가 불거질 때 톱스타의 열애설이 도배되는 상황들. 당신이 이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미디어의 정글에서 잡아먹히기 딱 좋은 순진한 초식동물이다. 세상에 우연한 헤드라인은 없다. 뉴스 큐시트의 순서는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기획되고 배치된 것이다. 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연예면이 유독 시끄러운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것은 고도로 계산된 시선 분산 전술, 즉 'Distraction'이다.

대중은 연예인의 사생활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느라, 정작 자신들의 지갑에서 세금이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자신들의 권리가 어떻게 입법 기관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는지 까맣게 잊어버린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가 던진 죽은 고양이를 보며 분노하고, 슬퍼하고, 열광하지만, 정작 그 뒤에 숨겨진 진짜 진실,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거래는 보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현대 미디어 사회의 비극이자 희극이다.

불을 끄는 대신 옆집에 불을 질러라

이 전략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방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누군가 식탁에 죽은 고양이를 던졌을 때, 이성적으로 "여러분, 저 고양이는 가짜입니다! 저것은 우리의 시선을 돌리려는 수작입니다!"라고 외쳐봤자 아무 소용없다. 이미 사람들은 고양이의 끔찍한 모습과 악취에 압도당해 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시각적 충격은 논리적 설명을 항상 압도한다.

맞불 작전의 정석은 상대가 내 집에 불을 질렀을 때 허둥지둥 물을 길어와 끄는 것이 아니다. 내 집은 어느 정도 타게 내버려 두고, 기름통을 들고 뛰어가 상대방의 집에 더 큰 불을 지르는 것이다. 옆집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가스통이 폭발하면, 사람들은 내 집의 작은 화재에는 관심을 끄고 더 거대하게 타오르는 옆집의 불구경을 하러 몰려갈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피장파장의 오류라고 비난받을지언정,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들어가면 결국 승리하는 것은 더 더럽고, 더 뻔뻔하고, 더 자극적인 쪽이다. 고상한 척 점잔을 빼다가는 뼈도 못 추리는 곳이 바로 여론의 전쟁터다. 성인군자는 결코 승리할 수 없는 구조다. 승리는 진흙탕을 뒹굴 준비가 된 자의 몫이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진실은 언젠가 승리한다고 배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을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의 냉혹한 정글에서 승리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승리하는 것은 더 자극적이고, 더 선동적이며, 더 감정적인 스토리텔링이다. 죽은 고양이 전략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대중은 복잡한 인과관계나 지루한 팩트 체크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퇴근길에 스마트폰으로 보며 낄낄거리거나 욕할 수 있는, 씹기 좋은 안주거리다. 당신이 만약 억울한 누명을 썼다 하더라도, 그것을 논문처럼 논리적으로 해명하려 들지 마라. 아무도 당신의 긴 글을 읽지 않는다. 대신 대중이 씹기에 딱 좋은, 육즙이 팡 터지는 먹잇감을 던져줘라. 그 먹잇감이 당신을 공격한 적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통쾌하겠지만, 설령 무고한 희생양이라 해도 효과적이다.

전략적 관점에서 볼 때, 희생양의 유무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대중의 시선을 얼마나 확실하게 붙잡아둘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중의 시선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수단도 정당화되는 것이 이 바닥의 생리다. 잔혹하다고 욕하지 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시선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자가 살아남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그 승자는 대개 가장 능숙한 거짓말쟁이거나 시선 강탈자였다.

이슈의 블랙홀에서 살아남는 법

그렇다면 우리는 이 끔찍하고도 매혹적인 전략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식탁 위에 죽은 고양이가 떨어졌을 때, 비명을 지르며 호들갑을 떠는 대신 그 고양이를 던진 사람의 손을 봐야 한다. 누가 이 소란을 일으켰는가. 이 혼란의 끝에 이득을 보는 자는 누구인가.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지금인가? (Why Now?)", "누가 이득을 보는가? (Cui Bono?)" 이 두 가지 질문만이 당신을 기만으로부터 지켜줄 방패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차갑게 상황을 직시하는 눈을 길러야 한다. 뉴스의 행간을 읽고, 헤드라인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죽은 고양이는 너무나 강렬하고, 너무나 원초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욕하면서도 막장 드라마를 보게 되고, 혐오하면서도 자극적인 가십 기사를 클릭하게 된다. 뇌의 보상 회로가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게임은 끝이 없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고양이를 던질 것이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 고양이를 보며 소리를 지를 것이다. 그리고 그 소란 틈에서 진짜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며 조용히 미소 지을 것이다.

당신이 만약 조직의 리더라면, 혹은 대중의 시선을 받아야만 하는 위치에 있다면 이 잔혹한 전략을 반드시 기억해 두라. 이것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누군가 당신에게 이 전략을 사용할 때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정말로 언젠가 당신의 목을 조여오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을 때, 당신 주머니 속의 죽은 고양이가 당신을 구원할 유일한 동앗줄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 대가는 당신의 영혼 일부를 썩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파멸보다는 부패가 낫지 않은가. 살아남아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살아남은 자는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정글 같은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는 유일하고도 비열한, 그러나 가장 확실한 생존 법칙이다. 당신의 식탁 위에는 지금 무엇이 놓여 있는가? 맛있는 요리인가, 아니면 곧 던져질 죽은 고양이인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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