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며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순간이 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빳빳하게 다림질된 블라우스 깃을 축축하게 적시고, 쉴 새 없이 울려대던 전화벨 소리가 어느새 날카로운 이명처럼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 우리는 그것을 '위기'라고 부르며, 어떤 이들은 그것을 '지옥의 입구'라 칭한다. 당신이 밤을 새워가며 피와 땀으로 공들여 쌓아 올린 커리어의 탑이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며 위태롭게 흔들릴 때, 당신의 뇌는 공포에 질려 가장 원초적이고 바보 같은 명령을 내린다. "빨리 사과해. 납작 엎드려. 잘못했다고 빌어. 그러면 저들이 자비를 베풀 거야." 그 속삭임은 악마의 유혹처럼 달콤하다. 당장 쏟아지는 비난의 소나기를 피하고, 사람들의 동정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착한 아이로, 모범생으로 자라온 당신은 그 유혹에 너무나 쉽게 무릎을 꿇으려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당신의 멱살을 잡고서라도 그 입을 틀어막고 싶다. 제발 그 입 다물라. 당신이 뱉으려는 그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당신을 영원히 재기 불능의 심연으로 밀어 넣는 결정타가 될 테니까.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사과는 당신이 주말 드라마에서 보던 눈물 젖은 고해성사가 아니다. 그것은 냉혹한 정글 한복판에서 나의 가장 연약한 목덜미를 스스로 드러내며 "마음껏 물어뜯으세요, 나는 반격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치욕적인 항복 문서다.

이 상황에서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도덕 교과서를 찢어버리는 것이다. 유치원에서 배운 "잘못하면 사과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평화로운 놀이터에서나 통하는 규칙이다. 이곳은 전쟁터다.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터지는 전장에서 적군에게 "제가 실수로 당신의 참호를 밟았군요,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병사가 있다면 그는 미치광이거나 자살 지망생일 것이다. 지금 당신을 둘러싼 상황이 바로 그렇다. 당신의 사과는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오히려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오는 상어 떼를 불러모을 뿐이다. 위기 상황에서 리더의 미덕은 정직함이나 겸손함이 아니다. 생존 본능, 그리고 뻔뻔할 정도로 단단한 멘탈, 그것이 당신을 구원할 유일한 동아줄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마라. 공포에 잠식당하지 마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쓴 약보다 더 쓰고, 독보다 더 독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독을 삼켜야만 당신은 전장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반사적 사과는 하이에나를 부르는 피리 소리다

당신이 사과를 하는 순간 일어나는 일들은 끔찍하다 못해 참혹하다. 당신은 그저 상황을 무마하고, 끓어오르는 여론을 잠재우고 싶었을 뿐이겠지만, 세상은 그것을 '법적, 도의적 책임의 완벽한 인정'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단순한 해석의 차이가 아니다. 실질적인 '증거'의 확보 과정이다. 하이에나 떼를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멀쩡히 서서 당당하게 걷는 사자에게는 결코 덤비지 않는다. 그 사자가 아무리 늙고 병들었어도, 위엄을 유지하고 있는 한 그들은 거리를 둔다. 그러나 사자가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는 순간,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는 그 찰나의 순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떼로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낸다. 언론과 대중, 그리고 호시탐탐 당신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들은 바로 그 굶주린 하이에나다.

당신의 사과는 그들에게 정확한 좌표를 찍어주는 자살 행위다. "여기가 나의 약점입니다. 여기를 공격하면 내가 무너집니다. 자, 여기를 집중 포격하십시오."라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꼴이다. 사과문 한 장으로 모든 게 끝날 것이라 착각하지 마라. 그 사과문은 훗날 법정에서 당신을 옥죄는 가장 강력하고 반박 불가능한 증거로 채택될 것이다. 변호사가 아무리 당신을 변호하려 해도, 판사는 당신이 직접 쓴 사과문을 들이밀며 "본인이 인정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때 당신은 무엇이라 답할 텐가? "그때는 분위기가 너무 무서워서..." 같은 구차한 변명은 당연하게도 통하지 않는다.

더 무서운 것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박제장이다. 디지털 세상은 망각하지 않는다. 당신의 비굴하게 고개 숙인 모습, 눈물을 글썽이며 읽어 내려간 사과문의 문구 하나하나는 영원히 박제되어 조리돌림 당할 것이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 당신이 재기하려 할 때마다, 그 영상과 텍스트는 좀비처럼 되살아나 당신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과거에 잘못을 시인했던 무능한 리더", "문제를 일으키고 도망치듯 사과했던 비겁한 사람"이라는 낙인은 주홍글씨처럼 당신의 이마에 새겨진다. 그러니 위기가 닥쳤다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대신 차라리 고개를 뻣뻣이 들고 그 하이에나를 노려보라. 뻔뻔함은 욕을 먹지만, 비굴함은 멸시를 받는다. 욕은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고 잊혀지지만, 멸시는 당신의 브랜드 가치를 바닥까지, 아니 지하 멘틀까지 끌어내린다. 차라리 "오만하다"는 욕을 들어라. "무능하고 비굴하다"는 평가보다는 백 배 낫다.

침묵은 금이 아니라 당신을 죽이는 맹독이다

그렇다면 "그래, 사과가 위험하다면 입을 닫고 가만히 있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무대응이 상책이라는 옛말을 믿는다면, 당신은 스마트폰도 없던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 특히 초연결 사회에서 침묵은 동의다. 아니, 단순한 동의를 넘어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폭제이자 최악의 시나리오를 완성시키는 캔버스다. 당신이 입을 다물고 있는 그 시간 동안, 대중은 빈칸을 채우기 시작한다. 팩트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뇌는 정보의 공백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 공백을 자신이 가진 편견과 공포, 그리고 자극적인 상상으로 채워 넣는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당신은 이미 단순한 실수자가 아니다. 당신은 계획적인 횡령범이거나, 부하 직원의 고혈을 빠는 갑질의 화신이거나, 능력도 없으면서 줄을 잘 서서 그 자리에 앉은 무능한 낙하산이 되어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언제나 현실보다 잔혹하고, 훨씬 더 자극적이다. 당신이 침묵하며 숨어있는 골방의 문 밖에서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어느새 그것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사실(Fact)'로 굳어진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고 아무리 해명해도 소용없다. 이미 대중의 뇌리에 신경가소성 원리에 따라 당신은 '그런 사람'으로 회로가 형성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침묵하지 마라. 절대 숨지 마라. 대신 '소음(Noise)'을 만들어라. 당신을 향한 비난의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질 때, 그 화살을 피하려 웅크리지 말고 더 큰 폭음을 터뜨려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켜라. 정치판에서 수십 년간 검증된 '죽은 고양이(Dead Cat)' 전략을 기억하는가? 우아한 식사 자리에서 대화가 당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 식탁 위에 혐오스럽고 끔찍한 죽은 고양이를 툭 던져놓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식탁 위의 지저분한 음식이나 당신의 실수 따위는 즉시 잊어버린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그 기괴한 고양이에게 꽂히고, 입에서는 "저게 뭐야!", "세상에!"라는 탄성만이 터져 나온다.

당신의 위기를 덮을 수 있는, 혹은 최소한 시선이라도 돌릴 수 있는 충격적인 이슈를 던져라. 그것이 논란이 되어도 상관없다. 아니, 논란이 될수록 좋다. 경쟁사의 더 큰 비리를 암시하는 정보를 흘리거나, 업계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판을 키우거나, 아니면 전혀 엉뚱하지만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파격적인 선언을 하라. 중요한 것은 대중이 당신의 '실수'를 씹고 뜯고 맛보는 그 즐거움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들의 식탁을 엎어버려라. 혼란을 야기하라. 정보의 홍수를 만들어라. 사람들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헷갈리게 만들어라. 명료하고 착한 사과보다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해명이 백 번 낫다. 그 혼란의 안개 속에서 당신은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고, 은밀하게 빠져나갈 개구멍을 찾을 수 있다.

구차한 변명은 쓰레기통에, '대의'라는 프레임을 입어라

입을 열기로 결심했다면 무엇을 말해야 할까? 제발 부탁이니 "의도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실수였습니다", "잘 몰랐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따위의 구차한 변명은 집어치워라. 그런 말은 "나는 무능합니다", "나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멍청이입니다"라고 전광판에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다. 대중은 악당은 결국 용서해도, 멍청한 리더는 혐오한다. 악당은 최소한 매력적일 수 있고, 능력 있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징징거리는 무능력자는 밟아버리고 싶은 충동만을 일으킬 뿐이다. 당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대신, 그 행위의 당위성을 주장하라. 프레임(Frame)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당신의 행동이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부주의한 실수가 아니라, 더 큰 대의(Great Cause)를 위한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고 포장하라. 스토리텔링의 마법을 부려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예산을 초과하여 회사에 손실을 입혔는가? "숫자를 잘 못 봤습니다"라고 하면 당신은 해고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떤가.

"예산을 초과한 것은 사실입니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프로젝트 달성을 위해, 나아가 우리가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는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투자였습니다. 저는 당장 욕을 먹는 것이 두려워 현실에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제 목을 걸고서라도 시기상 놓치면 안 되기에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고자 했습니다. 그 열정이 과했다면 비난하십시오.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 하는 것이 저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미션이었습니다."

어떤가? 횡령이나 배임, 혹은 무능의 뉘앙스는 사라지고, 열정 과다로 인한 오판, 혹은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고독한 결단이 가미된 것이다. 심지어 그 무모함이 일종의 결기(Current)로까지 보인다. 사람들은 '대의명분' 앞에 약하다. 당신이 그저 욕심 많은 속물이 아니라, 무언가 거창하고 숭고한 목표를 위해 싸우다 상처 입은 투사처럼 보이게 만들어라. 설령 그것이 말장난에 불과한 궤변일지라도, 당당하고 확신에 차서 내뱉는 궤변은 일말의 설득력을 가진다. 안티도 생기지만 우군도 함께 생긴다. 사과를 하는 순간 당신은 명백한 '가해자'가 되지만, 대의를 주장하는 순간 당신은 '혁명가'가 된다. 포지셔닝(Positioning) 자체가 천지차이로 달라지는 것이다. 당신을 비난하던 사람들도 "그래도 저 사람은 깡다구는 있네", "그래도 뭔가 생각이 있어서 저랬겠지"라며 멈칫하게 된다. 그 멈칫하는 순간이 바로 당신이 갈 길이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설계하고 인지 부조화를 유도하라

대중은 이성적이지 않다. 그들은 철저히 감정적이다. 그들은 논문보다 소설에 반응하고, 팩트보다 스토리에 열광한다. 당신을 비난하는 그들의 분노는 정의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누군가를 짓밟고 끌어내리면서 느끼는 집단적 카타르시스,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일 뿐이다. 그들에게 그 즐거움을 순순히 주지 마라. 대신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어라. 당신이 가해자로 몰린 상황이라면, 역으로 당신이 피해자임을 호소하라. 억울함을 토로하고, 당신 역시 거대한 시스템, 혹은 보이지 않는 음모의 희생양이었음을 주장하라.

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톤 앤 매너(Tone & Manner)다. 절대 질질 짜지 마라. 눈물 콧물 흘리며 읍소하는 것은 촌스럽고 없어 보인다. 건조하고, 차갑고, 단호하게 말하라. 마치 법정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나도 힘들었다"는 식의 감정 호소는 통하지 않는다. 대신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대중에게 던져라. 화살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저의 실수가 아닙니다. 이 보도가 나온 시점이 참 공교롭지 않습니까? 왜 하필 지금일까요? 누가 이득을 볼까요?" 이 한마디를 던져라. 사람들은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를 싫어한다. 나쁜 놈인 줄 알고 신나게 돌을 던졌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 뒤에 더 큰 흑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면, 돌을 든 손이 머쓱해진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 틈을 파고들어라. 당신을 공격하는 주체(그것이 내부 고발자든, 경쟁사든, 언론이든)의 순수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어라. 음모론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팩트는 지루하지만 음모는 흥미진진하다. 대중의 분노가 당신에게서 떠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흑막, 혹은 시스템으로 향하게 하라. 당신은 그저 그 거대한 싸움터에 홀로 서 있는 외로운 개인으로 남아야 한다. 동정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독하네", "보통 내공은 아니네",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겠네"라는 평가를 받아내야 한다. 그것이 이 전장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다.

비석이 될 것인가, 전설이 될 것인가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쩌면 유일한 변수는 바로 당신의 멘탈이다. 세상이 당신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믿었던 동료들이 등을 돌리고, 내일 아침 신문에 당신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릴지라도, 당신은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거울을 보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라. "나는 당당하다. 나는 소명을 다 했다.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나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당신 스스로가 당신의 결백(혹은 정당성)을 믿지 않으면,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당신의 눈빛이 0.1초라도 흔들리는 순간,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하이에나들은 그 떨림을 귀신같이 감지한다. 즉시 물어 뜯으러 달려들 것이다.

뻔뻔함은 타고나는 성격이 아니라, 학습되고 훈련되는 능력이다. 철면피는 유전자가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갑옷이다. 위기 상황에서 도덕적 고결함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 윤리는 배 부르고 등 따뜻한 평화로운 시절에나 따지는 사치품이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배가 뒤집히려는 찰나에 갑판을 청소하고 있을 텐가? 당연히 키를 잡고 파도를 뚫고 나가야 한다. 설령 그 과정에서 배가 좀 부서지고, 선원 몇 명이 다치는 것은 신이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선장인 당신이 살아남고 배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배는 다시 고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바다에 빠져 죽으면, 깨끗한 갑판이 무슨 소용인가. 수장된 시체에 불과할 뿐이다.

명심하라. 당신이 사과를 고민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는 당신의 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력서를 다듬고 있다. 그들에게 빈틈을 보이지 마라. 당신의 사과문은 그들에게 축배를 들게 할 최고의 안주거리에 불과하다. 끝까지 버텨라. 끝까지 우겨라.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아라. 훗날 사람들은 당신이 그 위기 상황에서 어떤 진실을 말했는지, 무엇이 팩트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진다. 그저 당신이 그 모진 풍파를 겪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건재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독하고 질긴 생존력에 경외심을 보낼 뿐이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다. 승리한 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역사도, 평판도, 그리고 진실마저도 당신이 쥐고 흔들 수 있다. 패배자의 사과는 비석에나 새겨질 뿐이다. 차가운 비석이 되어 종료할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아 역사를 써 내려갈 것인가. 선택은 오직 당신의 몫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