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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신의 언어였을까?

고대 이집트인에게 히에로글리프는 왕권과 종교의 상징이었다. 파라오의 무덤 벽화나 신전 기둥을 장식하던 복잡한 문양은 신의 뜻을 전하는 통로처럼 여겨졌다. 그리스어로 ‘신성한 새김(Hieros+Glyphos)’이라 불린 이 상형문자 체계는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특별한 매개였다고 전해진다. 왜인지 모르게 사람들은 그림 한 개가 온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다고 믿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를 가장 오래된 신의 언어로 칭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히에로글리프가 곧바로 알파벳이 되었을까. 직접적 계승 관계를 따지면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프로토-시나이 문자라고 불리는 초기 음소 문자가 시나이 반도에서 태동했고, 이를 받아들인 페니키아 상인들이 고대 이집트 문자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이집트 상형문자가 곧장 알파벳으로 점프했다고 보기엔 시간과 공간의 간극이 작지 않다. 여러 민족의 교류와 무역, 지역 특유의 언어 습관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히에로글리프 일부 기호가 음가(音價) 중심 체계로 진화한 것이다.

 

신전 벽화에 새겨진 한 자 한 자는 왕과 사제들만이 해독할 수 있었다. 그만큼 문자와 지식은 권력이었다. 선사 시대부터 이어진 구술 전통을 깬 이 새로운 기술은 그때까지만 해도 전수받기 까다로운 성직자의 전유물에 가까웠다. 신의 언어라 불린 건 그 상징성이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잘 드러낸다. 문제는 히에로글리프가 지나치게 어렵고 방대하다는 점이었다. 수백, 수천 개에 달하는 기호를 외우기란 일반인에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종교적 의식이나 왕의 선언을 담는다는 신성함과 별개로, 정보 확산에는 영 불리한 체계였다.


인간이 알파벳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시나이 반도의 광산 노동자들은 효율을 갈망했다.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은데, 길고 복잡한 문양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 갈 겨를이 어디 있었을까. 이런 호소가 실제로 기록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당대의 환경을 생각하면 무리는 아니다. 그들은 히에로글리프에서 일부 음소를 빌려와 간결한 기호로 만든다. 신성성이 깃든 상형문자 중 핵심 소리를 나타내는 요소만 추려낸 결과물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원형적 자음 문자가 훗날 페니키아인에게 전해졌다.

 

페니키아는 해상 무역의 강자였다. 수많은 항구를 드나들며 거래하고 계약하고 교역해야 했으므로, 빠르고 표준화된 의사소통 수단이 절실했다. 거래품 목록을 적고, 계산하고, 외부 민족과 협상하려면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는 문자가 필요했다. 거창하게 신의 이름을 새길 필요도 없었다. 돈과 물품이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를 정확히 쓰면 충분했다.

 

그렇게 태어난 페니키아 알파벳은 단 22개의 자음 기호로 거의 모든 말을 표현하는 획기적 체계였다. 히에로글리프와 달리 그림으로 꾸미거나 신성한 제의를 담을 필요가 없었다. 속도와 효율이 최우선 가치가 되었다. 이 혁신은 곧바로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그리스, 로마, 유럽 전체 문자의 근간이 된다. 알파벳이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어 알파(Α)와 베타(Β)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한때 신전 안에만 머물렀던 기록 기술이 항해자와 상인의 손에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앞으로 알파벳은 어디로 나아갈까?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를 지나 유럽 전역으로 퍼진 알파벳은 결국 전 세계 여러 언어의 표음 체계 기반이 되었다.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다양한 문자 체계에서 로마자를 사용해 병기한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라틴 알파벳은 국제 표준(ASCII 등)으로도 자리 잡았다. 한자 문화권이나 아랍 문자권도 디지털 환경에서 라틴 자판을 사용해 이메일 주소를 입력한다. 문자 체계가 마치 유전자처럼 전 지구적 확산을 이루어낸 셈이다.

 

미래에는 어떻게 변할까. 글보다 말, 말보다 이미지, 이미지보다 더 직관적인 신호가 등장할 수도 있다. 이모지나 밈이 소통의 한 축을 담당하는 시대에 이미 들어섰고, 인공지능이 문자를 음성이나 영상으로 실시간 번역하는 순간, 알파벳의 역할은 또 다른 차원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있다. 가령 두뇌에 칩을 심어 의사를 교환하는 기술이 대중화되면, 음소로 분절된 알파벳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오래전 신의 언어로 불리던 이집트 문자가 상인들의 손에서 꽃피운 후대 알파벳처럼, 혁신은 늘 기존 체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필요로부터 기인한다. 신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문자라는 점이 중요하다. 성스러운 이미지로만 남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세계로 뻗어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알파벳은 인간의 소통 욕구와 가장 긴밀하게 결합해 살아남아 발전해 왔다. 신에게서 왔다고 믿었지만, 결국 인간의 의지가 문자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종교적 상징과 실용적 교역이 만난 자리에 문자의 진화가 존재했다. 히에로글리프가 가진 신성성이 꼭 부정당한 것은 아니다. 여러 문화와 문자체계는 그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며 독자적 영역을 구축했다. 그럼에도 때론 단순함이 세상을 움직이기도 한다. 알파벳이 그랬다. 더 빠르고 더 멀리 전파된 이유는 우연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문자를 재창조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언어의 본질을 나타내는 의미 있는 통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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