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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선지 불편한 질문
“틀렸다”와 “다르다”라는 두 단어는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 차이는 깊고도 섬세하다. 때로는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어떤 주장이 “틀림”을 지적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종교나 철학, 심지어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이 두 단어를 혼용하면서, 우리는 서로 ‘옳다 vs. 틀렸다’라는 양분된 시각에 익숙해져 왔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여기에는 커다란 함정이 존재한다. 누군가 주장하는 바가 과학적 기준에서 틀릴 수 있으나, 그 사람의 믿음 체계 안에서는 전혀 틀린 게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의 차이가 쌓여 종종 거대한 갈등으로 번진다. 특히 종교는 사회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으면서도, 과학이 다루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해석의 과정을 거치기에 더욱 복잡하다.
“틀림”과 “다름”의 간극
우선 “틀림”이라는 말은 보통 객관적으로 오류가 있음을 지적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지구는 평평하다”라는 주장은 과학적 실험과 관측을 통해 반증되었으므로, 이론적으로도 실증적으로도 틀렸다고 밝혀졌다. 반면 “다르다”는 단지 서로 다른 특성이나 관점을 가리킬 뿐, 그 안에 오류를 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교와 과학의 충돌 지점에서 누군가 “네 주장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과학적 사실에 근거해 반증이 가능하다는 뜻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주의 나이를 6천 년이라 주장하는 교리나 신념은, 과학적 연구(빅뱅 이론 및 우주 배경복사 탐지 등)로 약 138억 년이라는 추정치를 확보한 현대 천문학과 배치된다. 그래서 과학을 기준 삼았을 때 “틀림”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의 종교적 관점에서는,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교리와 다르다’라는 말을 그렇게 한 것일 수 있다.
결국 “틀림”과 “다름” 사이를 오가면서 충돌과 갈등이 발생한다. 이 갈등은 흔히 “내 입장에서 상대방은 틀렸다”라는 선언으로 이어지는데, 그 뿌리를 따라가 보면 각자 지향하는 기준과 해석의 틀이 전혀 다르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오류를 통해 더 단단해지는 과학
종종 “과학도 틀릴 때가 많지 않은가?” 하는 반론이 제기된다. 실제로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때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이론이 완전히 폐기되거나 대폭 수정된 사례가 적지 않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중세까지 이어진 지구 중심설(천동설)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 등의 연구를 통해 철저히 뒤집혔다. 뉴턴의 물리학 역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앞에서 더 넓은 조건에서의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이 이렇게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이, 오히려 과학의 장점이 된다. 오류를 발견하면 그 이론을 폐기하거나 보완하면서 더 나은 개념으로 발전해 나간다. 이는 과학이 지닌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과학에서의 “틀림”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겸손을 담고 있다. 일종의 자기정화 시스템으로, 언제든 오류가 드러나면 스스로를 갈아엎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야말로 과학의 입장이다.
움직이는 신앙? 믿음이 바뀌어도되나?
그렇다면 종교는 어떨까? 종교도 사회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해석을 달리하며 변화를 이어 왔다. 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는 천동설을 교리적 진리로 믿었지만, 이후 갈릴레이의 관측이 태양 중심설을 뒷받침하고 과학계와 성직자 사이에 극심한 충돌이 생겼다. 그 갈등의 결과, 결국 다른 방식으로 우주관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종교의 가르침이나 교리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형·보완되며 재해석되는 과정을 겪는다.
물론 그 변화 방식은 과학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과학이 새로운 실험과 데이터로 기존 이론의 틀림을 증명해내는 반면, 종교는 해석과 신학적 논의를 통해 조금씩 관점을 조정한다. 예컨대 “신의 말씀”을 직접 반증하는 대신, “신의 뜻이 이런 의미였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해석의 폭을 넓히며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도 완벽한 고정관념이 아니라, 시대의 요청과 문화적 변화를 수용하면서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어 갈 수 있다.
교차로에 선 우리: 틀림, 다름, 그리고 공존
궁극적으로 “틀림”과 “다름”을 구분하는 문제, 그리고 이 둘을 받아들이는 과학과 종교의 태도는 우리의 인식 세계가 얼마나 복잡한가를 일깨워준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완벽히 틀린 것처럼 보이는 주장도, 다른 범주나 신념 체계 안에서는 그냥 다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차이를 단순히 “각자의 믿음이니 존중하자”로 끝내버리면, 사회적 갈등과 오해는 해소되지 않는다. 반대로, “과학이 최고다, 과학에 반하는 건 모두 틀렸다”라고 극단적으로 접근하면, 종교가 담고 있는 정신적·문화적 가치와 그 변화 역시 놓칠 위험이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검증 가능한 영역에서는 과학적 기준을 존중하고, 해석이 필요한 영역에서는 종교를 존중하여 서로의 믿음 체계를 “다름”으로 인정하며 대화의 여지를 남기는 태도일 것이다. 과학이 말하는 “틀림”이 곧바로 모든 신념의 부정을 의미하지 않고, 종교가 주장하는 불변성 또한 타협 불가능한 완벽한 교리만을 뜻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넓은 시야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길은 험난할지라도, 과학과 종교가 함께 진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매력적이다. “틀림”과 “다름”을 넘나드는 이 작은 차이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진화하는 과학과 움직이는 종교를 나란히 놓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하는 인류 역사를 목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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