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어둠 속에서만 그 존재를 증명한다. 칠흑 같은 어둠이 없다면 촛불의 흔들림은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물리 광학의 법칙을 넘어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서사의 법칙이다. 신화와 종교, 그리고 현대의 정치와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이 명제는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우리는 흔히 선이 악을 이기는 승리의 카타르시스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의 무의식은 '이길 만한 가치가 있는 강력한 악'을 더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영웅은 스스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거대한 악(Villain)'에 의해 잉태되고 길러지며 완성된다. 예수를 구세주로 만든 것은 단순히 그가 행한 기적들 때문만이 아니다. 광야에서 그를 시험하고 끊임없이 유혹했던 사탄이라는 명확한 대척점이 존재했기에, 그리고 그 유혹을 이겨내고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했기에 그의 서사는 숭고한 구원의 드라마로 완성될 수 있었다. 만약 사탄이 없었다면, 예수는 그저 도덕적인 설교자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이 불편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진실, '악당의 필요성(The Necessity of Villain)'에 대해 아주 깊숙이 파고들려 한다. 당신이 지금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무대를 압도할 '악당'을 아직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웅은 스스로 탄생하지 않는다

물리학에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있듯, 스토리텔링과 현실 세계의 역학에도 동일한 법칙이 적용된다. 평화로운 시대, 아무런 갈등이 없는 유토피아에서 영웅은 실직자나 다름없다. 영웅의 자격 요건 제1조는 '해결해야 할 난제의 유무'이며, 그 난제가 인격화된 것이 바로 빌런(Villain)이다.

우리가 열광하는 모든 영웅 서사를 해체해보라. 1984년, 스티브 잡스가 내놓은 전설적인 매킨토시 광고를 기억하는가? 그는 당시 컴퓨터 시장을 지배하던 IBM을 조지 오웰의 소설 속 '빅 브라더'로 규정했다. 화면 속의 획일화된 군중과 그들을 세뇌하는 거대한 스크린, 그리고 그 스크린을 향해 망치를 던지는 여전사. 이 1분짜리 광고는 애플을 단순한 컴퓨터 제조사에서 '자유와 혁신의 전사'로 단숨에 격상시켰다. 만약 당시 IBM이라는 압도적인 지배자가 없었다면, 애플의 매킨토시는 그저 조금 더 예쁜 컴퓨터에 불과했을 것이다. 잡스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신이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이 공포를 느끼거나 답답해하는 거대한 대상을 지목하고, 그에 맞서는 다윗의 돌멩이를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이처럼 영웅의 위대함은 그가 가진 능력의 절대값이 아니라, 그가 상대하는 적의 크기에 비례하여 결정된다. 잔잔한 파도에서는 훌륭한 뱃사공이 탄생할 수 없듯이, 시시한 악당 앞에서는 위대한 영웅이 탄생할 수 없다. 당신의 이야기가 지루하다면, 당신이 싸우고 있는 대상이 너무 시시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배트맨에게 조커가 필요한 이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걸작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취조실에 갇힌 채 배트맨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날 완성시켜(You complete me)." 이 섬뜩한 고백은 히어로물의 핵심을 꿰뚫는, 아니 인간 관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명대사다.

배트맨과 조커는 전형적인 '적대적 공생(Hostile Symbiosis)' 관계다. 생각해보라. 범죄가 없는 고담 시에서 배트맨은 무엇일까? 그는 그저 밤마다 박쥐 코스튬을 입고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억만장자 기행남, 혹은 심각한 트라우마 환자일 뿐이다. 그러나 조커라는, 이해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절대적 혼돈과 광기가 존재함으로써, 배트맨의 강박적인 질서와 비살상의 원칙은 비로소 숭고한 철학으로 승화된다. 조커가 미쳐 날뛸수록 배트맨의 인내는 빛을 발한다.

이러한 관계는 비단 만화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를 보라. 냉전 시대의 미국과 소련은 서로를 '악의 제국'으로 규정하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거대한 적이 존재했기에 양국은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고 체제를 결속시킬 수 있었으며, 우주 개발과 과학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소련이 붕괴된 후 미국은 한동안 '세계의 경찰'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 새로운 적, 즉 테러리즘이 부상하기 전까지 말이다. 적은 나를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나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확실한 거울이기도 하다. 당신에게 지금 조커가 있는가? 당신을 미치도록 괴롭히지만, 동시에 당신을 살아있게 만드는 그 존재가 없다면, 당신은 아직 배트맨이 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대중의 불안을 '특정 집단' 탓으로 돌려라

리더십의 관점에서, 혹은 통치공학적 관점에서 빌런의 존재는 '통치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춰주는 마법의 도구다. 대중은 막연한 불안을 견디지 못한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삶이 팍팍해지고, 미래가 불투명할 때 사람들은 그 원인을 찾고 싶어 한다. 이때 가장 유능한(동시에 가장 위험한) 선동가는 복잡한 사회 구조적 문제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그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킨다. "저들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포의 외주화(Outsourcing of Fear)'다. 중세의 마녀사냥을 떠올려보라. 흑사병이 돌고 기근이 닥쳤을 때, 권력자들은 그 원인을 신의 분노나 위생 문제가 아닌 '마녀'에게 돌렸다. 마을의 과부나 이방인을 마녀로 지목하고 화형시킴으로써, 대중의 공포와 분노는 배출구를 찾았고 체제는 유지되었다. 현대라고 다를까? 이민자, 특정 인종, 특정 세대, 혹은 젠더를 향한 혐오의 기저에는 우리의 불행을 책임져야 할 '현대판 악마'를 찾고자 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 달라진 게 없다.

악마를 설정하는 순간 세상은 놀랍도록 단순해진다. 복잡한 경제 지표를 분석하거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댈 필요가 없다. 저 악마만 처단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히 비윤리적이다. 하지만 역사상 이보다 더 강력하고 효율적인 대중 결집 수단은 없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종종 차가운 진실이 아니라, 뜨거운 분노를 쏟아낼 대상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적이 강대할수록 당신의 돌멩이는 신성해진다

브랜딩이나 선거 캠페인에서 전략가들이 가장 공들여 하는 작업 중 하나는 '상대 설정(Enemy Setting)'이다. 이것은 단순히 누구와 싸울지를 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싸우는 그림을 만들 것인가'의 문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만만한 상대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하고 위압적인 상대를 고르는 것이다.

당신이 이제 막 시작한 스타트업이라면,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공룡 기업의 부조리함을 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당신이 정치 신인이라면, 낡고 부패한 기득권 카르텔 전체를 적으로 삼아야 한다. 적이 강대하고, 교활하며, 사악해 보일수록, 그에 맞서는 당신의 도전은 무모한 객기가 아니라 '신성한 투쟁'이 된다. 이것이 바로 '골리앗 설계하기'다.

성경의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우리가 감동하는 지점은 다윗의 승리가 아니다. 거인 골리앗 앞에 섰을 때 느꼈을 다윗의 공포, 그리고 그것을 이겨낸 용기다. 대중은 본능적으로 언더독(Underdog)을 응원한다. 하지만 그 언더독이 단순히 약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거대하고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명분과 배짱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당신의 서사를 매력적으로 만들고 싶다면, 당신을 괴롭히는 시련의 크기를 과장하라. 당신이 싸우고 있는 대상이 얼마나 거대하고 끈질긴지 세상에 널리 알려라. 골리앗의 그림자가 짙고 길게 드리울수록, 다윗이 던지는 돌멩이의 궤적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법이다.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은 '공동의 적'을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를 보라. 현대 정치는 더 이상 정책 대결의 장이 아니다. 누가 더 효과적으로, 더 자극적으로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느냐의 싸움이 되었다.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복잡한 정책 공약집을 내미는 것은 하수다. 고수는 지지층에게 공포를 판다. "우리가 무엇을 하겠다"라는 희망찬 청사진보다, "저들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 "저들이 당신의 삶을 파괴할 것이다"라는 공포의 메시지가 훨씬 더 강력한 전염성을 갖는다.

정치적 양극화는 이러한 전략의 필연적 결과물이다. 나의 정의를 증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절대악으로 규정해야 하는 제로섬 게임. 이 과정에서 뉘앙스, 타협, 중용은 설 자리를 잃는다. 오로지 피아식별만이 남는다.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은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에는 탁월한다. 하지만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한다.

이것은 비극이지만, 동시에 정치 공학적으로는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공동의 적'은 모래알 같은 개인들을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뭉치게 만든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유대인이라는 가상의 적을 통해 독일 국민을 광기로 몰아넣었듯, 현대의 포퓰리스트들 역시 끊임없이 내부의 적, 기득권, 혹은 외부의 침입자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안다. 평화는 지루하고, 전쟁은 흥분된다는 것을. 그리고 표는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흥분한 사람들의 뜨거운 손에서 나온다는 것을.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선포하라

이제 긴 이야기의 결론을 내릴 시간이다. 당신이 조직을 이끄는 리더이건, 시장을 개척하는 마케터이건, 혹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드라마를 써 내려가는 주인공이건 간에, 당신에게는 반드시 '나쁜 놈'이 필요하다. 그것은 당신의 내면에 있는 게으름일 수도 있고, 당신을 가로막는 불합리한 사회 제도일 수도 있으며, 시장을 장악한 강력한 경쟁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을 명확히 정의하고, 그와의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밋밋한 긍정의 메시지, "우리는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 합니다"와 같은 말로는 누구의 가슴도 뛰게 할 수 없다. 심지어 당신 자신의 가슴조차 뛰지 않을 것이다. 대신 "저 거대한 불의에 맞서 함께 싸웁시다", "이 지긋지긋한 한계를 부수고 나아갑시다"라는 외침이 사람들을 움직인다.

당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가? 당신의 브랜드에 열광적인 팬덤을 만들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의 예수(구원과 희망)를 설파하기 전에, 먼저 당신의 사탄(위협과 공포)이 누구인지 보여주어라. 적이 명확해질 때, 비로소 당신이 가야 할 길도 명확해질 것이다.

사탄이 없으면 예수도 없다. 이것은 신학적 신성모독이 아니라, 태생부터 인류를 지배해온 차가운 자연 법칙이다. 자, 이제 묻겠다. 당신의 무대는 지금, 어떤 빌런을 기다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