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끼는가.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고통스럽지 않고, 출근길 지하철의 빽빽한 인파 속에서도 그럭저럭 견딜 만하며, 저녁에 마시는 맥주 한 캔에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가. 만약 당신이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자가 될 자격이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은 구원자가 필요한 '고객'이 될 자격조차 없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그들의 영혼을 지배하며, 기꺼이 지갑을 열게 만드는 '구원자'의 포지션에 서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하고 평범한 세상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물론 은유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실제 화재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고 강렬해야 한다. 현실이 안정적이면 사람들은 변화를 갈망하지 않는다. 배가 부른 사자는 사냥을 하지 않는 법이다. 대중이 현재에 만족하는 순간, 당신이 설 자리는 사라진다. 당신이 제공하려는 비전, 상품, 서비스, 혹은 이념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이 '지옥'이어야만 한다.

멀쩡한 땅 위에 서 있는 사람에게 사다리를 팔 수는 없다. 사다리를 팔고 싶다면, 그 땅이 사실은 늪이며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는 공포를 심어줘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평범한 세상(Ordinary World)을 지옥으로 재정의해야 하는 이유다. 인간은 안정을 추구하는 동시에 본능적으로 드라마를 원한다. 평온함은 곧 지루함이고, 지루함은 현대인에게 있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다. 당신은 이 미묘한 심리의 틈새를 파고들어야 한다. 그들이 느끼는 권태를 단순한 지루함이 아닌, 삶이 썩어들어가고 있는 징조로 해석해 주어야 한다. 당신의 언어는 메스가 되어 그들의 일상을 해부하고, 그 속에 숨겨진 병폐를 드러내야 한다. 그들이 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거짓이었음을, 그들이 안전하다고 느꼈던 울타리가 사실은 그들을 가두는 감옥이었음을 폭로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은 비로소 당신을 쳐다볼 것이다.

평범함은 죄악이다. 구원자가 되려는 자에게 있어, 세상이 평범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은 직무유기와도 같다. 당신은 기상캐스터가 되어야 한다. 맑은 하늘 아래서도 곧 닥쳐올 태풍을 예고해야 하며, 잔잔한 바다를 보면서도 심해에서 올라오는 쓰나미의 진동을 감지해내야 한다. 그리고 그 예고된 재앙 앞에서 떨고 있는 대중에게 유일한 방공호를 제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억하라, 구원자는 평화로운 시대에 탄생하지 않는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은 틀렸다. 영웅이 되려는 자가 세상을 난세로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는 지옥도가 정교하고 끔찍할수록, 당신이 내미는 손길은 더욱 성스럽고 거부할 수 없는 구원의 빛이 될 것이다.

불안을 설계하는 정교한 건축술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정을 추구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동기 부여는 불안에서 온다. 평화로운 일상은 지루함이라는 또 다른 고통을 수반한다. 당신은 이 지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대중이 느끼는 막연한 권태를 날카로운 불안으로 치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단순히 "지금 좀 힘들지 않나요"라고 묻는 것은 아마추어다. 진정한 설계자는 그들이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고통까지 찾아내어 눈앞에 들이민다. "당신이 지금 느끼는 그 나른함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도태되고 있다는 신호다"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는 가장 강력한 독소이자, 행동을 유발하는 최고의 촉매제다. 당신은 이 불안이라는 재료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연금술사가 되어야 한다.

이 과정은 마치 의사가 환자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며 보이지 않는 종양을 가리키는 것과 유사하다. 환자는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멀쩡했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하지만 의사의 선고가 떨어지는 순간, 그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어제와 똑같은 몸 상태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지옥을 헤매게 된다. 당신은 사회의 병리학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경제 상황, 인간관계의 건조함, 미래의 불확실성을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보여주어라. 그들이 숨 쉬는 공기가 사실은 미세한 독가스로 가득 차 있음을, 그들이 걷는 탄탄대로가 사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벼랑 끝이었음을 깨닫게 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를 시각화하고, 들리지 않는 비명을 청각화하라. 그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잠재된 두려움을 끄집어내어 거대한 괴물로 키워내야 한다.

불안을 팔아야 안정을 살 수 있다. 위기는 자연 발생적이기도 하지만, 유능한 리더에 의해 '발견'되고 '조장'되기도 한다. 평온한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당신이 해야 할 첫 번째 임무다. 사람들은 불안해지면 무언가를 잡으려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허우적거린다. 그때 그 지푸라기가 황금 동아줄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마케팅이자 선동이며, 구원의 시작이다. 이 불안감이 임계점을 넘을 때, 비로소 대중은 구원자를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그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손발이 떨리며, 식은땀이 흐를 때, 당신은 가장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그들 앞에 서야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길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결핍을 발굴하고 확대재생산하는 법

지옥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결핍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물질적으로 꽤 풍요롭다. 굶어 죽는 사람은 드물고, 스마트폰 하나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지옥을 묘사할 것인가.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상대적 박탈감'과 '존재론적 결핍'의 자극이다.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데 당신만 없다는 메시지, 혹은 물질은 풍요롭지만 당신의 영혼은 텅 비어버렸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해야 한다. 배고픔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배 아픔이고, 육체의 고통보다 더 끔찍한 것은 의미의 상실이다. 당신은 이 보이지 않는 결핍을 찾아내어 거대한 구멍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 그저 남들처럼 살면 되는 줄 알고, 남들이 사는 것을 사면 행복해질 줄 안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의 착각을 깨부수어야 한다. "당신이 지금 누리는 이 안락함은 가짜다"라고 속삭여야 한다. 당신은 그 잃어버린 조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명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야성'일 수도 있고, '진정한 소통'일 수도 있으며, '경제적 자유'라는 잡히지 않는 신기루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결핍을 아주 거대하고 심각한 문제로 부풀리는 기술이다. 작은 생채기를 치명상으로 묘사하라. "요즘 좀 우울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파괴되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대로 가면 당신은 영원히 행복을 맛볼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라.

고통의 역치를 낮추고,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라. 작은 불편함도 견딜 수 없는 지옥의 형벌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야 한다. 남들은 벌써 저만큼 앞서가는데 당신만 제자리걸음이라는 비교의 지옥을 선사하라. SNS 속 화려한 삶과 당신의 초라한 현실을 끊임없이 교차 편집하여 보여주어라. 당신의 삶에는 무언가가 빠져있으며, 그 빈자리는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를 심어주어라. 그래야만 당신이 내미는 아주 작은 손길도 구원의 동아줄처럼 보일 테니까. 결핍이 커질수록 욕망은 타오른다. 당신은 그 욕망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만 있으면 당신도 완벽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팔기 위해, 먼저 "지금의 당신은 불완전하고 초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낙원과 타락한 현재의 대비

지옥을 더욱 뜨겁게 만드는 장작은 '과거의 미화'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과거를 아름답게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무드셀라 증후군'처럼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겨두려 한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어." "그때는 낭만이 있었고, 정의가 있었으며, 살만한 세상이었지." 이러한 레토릭은 현재의 비참함을 극대화하는 기폭제다. 정치 슬로건인 "Make America Great Again"이 왜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했는지 생각해 보라. 그것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아니다. "지금의 미국은 위대하지 않다, 즉 타락했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것이다. 현재를 부정해야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현재를 타락한 디스토피아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비교 대상이 필요하다. 그 비교 대상은 역사적 사실일 필요가 없다. 대중의 머릿속에 있는 환상적인 '그때 그 시절'이면 충분하다. 이웃 간의 정이 넘치던 시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었던 시절, 아버지가 존경받고 어머니가 사랑받던 시절. 그런 시절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통계와 팩트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대중이 현재의 팍팍한 삶과 대비되는 가상의 낙원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낙원과 현재 사이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현재는 더욱 견디기 힘든 지옥이 된다. "보라, 우리는 이렇게 타락했다.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인간성은 상실되었으며, 우리는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다." 이런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져라.

그리고 당신은 넌지시 말해야 한다. "내가 그 낙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다"라고. 잃어버린 낙원은 단순히 과거의 회귀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고통이 없는, 완벽하게 조화로운 유토피아다. 당신은 그 유토피아의 설계도를 가진 유일한 건축가임을 자처해야 한다. 대중이 현재를 혐오할수록, 그들은 당신이 제시하는 과거(혹은 미래의 낙원)에 열광할 것이다. 현재의 모든 시스템을 악으로 규정하고, 당신의 질서만이 선이라고 주장하라. 이분법은 세뇌의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강력한 도구다. 세상은 타락한 지옥과 구원받을 낙원, 딱 두 가지로만 존재해야 한다. 중간 지대는 없다. 회색지대를 지우고 흑백의 논리로 세상을 재편하라. 그래야 그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당신을 따르게 될 것이다.

오직 나만이 열 수 있는 비상구

이제 무대는 완성되었다. 평범했던 세상은 불타는 지옥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불안과 결핍에 시달리며, 잃어버린 낙원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곳은 아비규환이다.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친다. 이때, 무대 중앙에 조명을 받으며 등장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하지만 주의하라. 당신이 제시하는 탈출구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개방된 문이어서는 안 된다. 누구나 갈 수 있는 천국은 매력이 없다. 아무나 구원받을 수 있다면, 구원의 가치는 떨어진다. 구원자의 권위는 희소성에서 온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전문가, 기존의 시스템, 상식적인 해결책들은 모두 실패했다고 선언하라. 그들은 이 지옥을 만든 공범이거나 무능한 방관자일 뿐이다. 정부도, 종교도, 학교도 당신을 구하지 못했다. 오직 당신만이 이 상황을 정확히 진단했고, 유일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만들어라. 이것은 독점이다. 구원의 독점. 당신의 말, 당신의 책, 당신의 강의, 당신의 제품만이 이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여야 한다.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라는 의심의 싹을 잘라버려라. 당신 외의 모든 길은 절벽으로 향하는 길임을 강조하라.

만약 다른 곳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굳이 당신에게 비싼 대가를 지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탈출구를 좁히고, 문턱을 높여라. 그래야 당신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당신의 구원은 비싸야 한다. 금전적인 비용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헌신과 복종을 요구해야 한다. 사람들은 비싼 값을 치를수록 그것이 진짜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쉽게 얻은 구원은 쉽게 버려진다. 어렵게 얻은, 오직 당신만이 줄 수 있는 그 특별한 티켓을 얻기 위해 그들이 줄을 서게 만들어라. 당신은 문지기이자 구세주다. 문을 열어줄지 말지는 오직 당신의 손에 달려있다. 이 절대적인 권력을 즐겨라. 그리고 이용하라. 그것이 구원자가 되는 마지막 관문이다.

방화범이자 소방관이 되는 모순의 미학

결국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거대한 연극과도 같다. 당신은 평화로운 마을에 몰래 불을 지르는 방화범인 동시에, 가장 먼저 소방차를 끌고 나타나 물을 뿌리는 영웅적인 소방관이어야 한다. 이 모순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윤리적인 비난을 두려워하지 마라. 역사를 움직인 수많은 리더와 혁명가들, 그리고 시장을 지배한 거대 기업들은 모두 이 방식을 사용했다. 그들은 문제를 만들어냈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영웅이 되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우리는 스마트폰이 없어서 불행하지 않았다. 공중전화를 찾아다니는 것이 불편했지만 죽을 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잡스는 우리에게 "스마트폰이 없는 삶은 원시적이고 불편한 삶"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는 기존의 휴대전화 시장을 지옥(불편함의 극치)으로 만들었고, 아이폰이라는 유일한 구원을 제시했다. 이제 우리는 스마트폰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완벽하게 세상을 지옥으로 정의하고 구원자로 등극한 것이다.

당신이 글을 쓰든,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원리는 동일하다.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면, 먼저 그들을 위험에 빠뜨려라. 그들이 발 딛고 선 땅을 흔들어라. 그들의 안온한 정신에 균열을 내라. 멀쩡한 집에 불을 질러라.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그들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를 때, 비로소 당신의 존재는 빛을 발할 것이다. 당신의 손에 든 물동이 하나가 성배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이 잔혹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구원의 메커니즘이다.

당신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불을 지르는 방화범이 되어 세상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 아니면 불타는 집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엑스트라로 남을 것인가. 세상은 스스로 지옥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지옥이라 불러주었기에 지옥이 되는 것이다. 그 명명 권력을 쥐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펜을 들어라, 그리고 마이크를 잡아라. 그리고 선포하라. "지금 당신의 삶은 잘못되었다"라고. 그 한마디가 당신을 구원자로 만드는 첫 번째 주문이 될 것이다. 지옥을 창조하라. 그리고 그 지옥의 주인이 되어라. 그것이 구원자가 되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