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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검정’이라는 부재가 이렇게 선명하게 다가오는가?
빛이 없음을 가리키는 검정은 색이 아니라는 견해가 오래전부터 주장되어 왔다. 파장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없으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검정은 분명히 색채로 취급된다. 수많은 예술 작품과 디자인, 심지어 디지털 기기에서도 검정은 하나의 구체적 선택지이다. 이 아이러니는 결국 인간의 지각이 빛의 부재마저 현존으로 받아들이는 묘한 작용에서 비롯된다.
거대한 물리 우주와 달리 우리의 뇌는 어떠한 감각 결핍도 하나의 의미로 해석한다. 눈을 감으면 시각의 결핍이 오히려 깊은 어둠을 만들어내고, 소리가 사라지면 그 순간의 공백이 오히려 '침묵'이라는 형태가 된다. 따라서 검정이라는 단어 속에는 “아무것도 없음”이 “분명히 있음”으로 치환되는 역설적 사고가 담긴다.
진짜보다 더 진한 어둠, 벤타블랙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어느 영국 기업이 개발한 벤타블랙은 빛의 99.965%를 흡수해 표면의 굴곡이나 형체조차 인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예술가들은 이 물질로 만들어낸 설치물을 두고 ‘검은 구멍’이라 부른다. 배경과 구분하기조차 쉽지 않은 검정 속에서는 모든 물체가 2차원으로 무너져버린다.
이 어둠은 단순히 색깔이 농도가 짙어졌다는 정도를 넘어선다. 일반 잉크의 검정이 보통의 어둠이었다면, 벤타블랙은 진공 상태의 색이라 불릴 만하다. 인간의 뇌가 형체를 인식하기 위해 의존하는 명암과 반사광이 전부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주가 무한히 팽창하며 멀리 떨어진 별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우리 눈에 검정이 아닌 ‘공간적 부재’가 나타나는 것과 유사하다. 이 극단적 어둠은 검정이 단순한 파장 결핍이 아니라, 인지와 감각의 간극을 체감하게 만드는 현장이다.
밤하늘에 가득한 공허는 왜 검정으로 보이는가?
밤하늘이 검정으로 보이는 현상은 우주의 크기와 팽창, 그리고 별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거대한 거리를 상상하면 조금 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올버스의 역설이 지적하듯 무한히 펼쳐진 우주가 정적 상태라면 밤하늘은 별빛으로 가득 차 밝아야 한다. 그러나 우주는 유한한 나이를 가지고 있고, 끊임없이 팽창하며 수많은 빛이 닿기 전 사라진다. 그 결과 인간의 시야에 도달하지 못한 광선들은 우리 눈에 영원히 어둠이라는 배경으로 남는다.
이 어둠은 사실상 완전한 부재가 아니다. 감마선, 적외선, 혹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스펙트럼들이 우주를 채우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한정된 감각 범위에서는 어둠이라는 결핍이 가장 쉽게 떠오르며, 그것이 곧 검정으로 보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마찬가지로 디지털 화면에서 진정한 검정을 구현하려면 스스로 빛을 거의 내지 않아야 한다. LCD처럼 백라이트를 무조건 켜두어야 하는 방식은 진짜 검정을 구현할 수 없다. 스스로 발광을 끄는 OLED 픽셀이 그나마 ‘진짜에 가까운 검정’을 보여주는 기술이다.
결국 검정은 빛의 부재이기도 하고, 동시에 감각과 심리적 해석이 만들어낸 하나의 색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가장 큰 존재감을 주는 역설. 검정은 결핍이자 완결, 시작이자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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