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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 여전히 중요할까?

1991년 소련이 붕괴된 후 오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세계 질서는 수없이 재편되었고, 인터넷과 초국가적 기업이 국가의 경계를 빠르게 허무는 중이다. 그런 변화 속에서도 과거 소련의 영향 아래 있던 동유럽 지역, 즉 흔히 말하는 동구권은 여전히 강력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 동구권을 단순히 ‘공산주의의 잔재가 남은 지역’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그 역사적 깊이가 깊다. 해당 지역의 문화는 대립과 융합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들이 빚어낸 독특한 정체성이 도드라진다. 예컨대 폴란드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탈피하자마자 유럽연합(EU)에 빠르게 합류했고, 헝가리는 내부 정세 변화를 거치며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선호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이처럼 각 나라는 냉전 시절 공산권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으나, 지금은 서구 지향 혹은 자국 중심 노선 등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동구권이라는 개념이 서구와 나눈 경계가 흐려졌다는 평도 나오지만, 여전히 언어·종교·생활양식 등에서 독자적인 특색을 유지한다. 정치 체제가 상당히 민주화되었어도, 과거 동방 정교회 문화가 깃든 러시아·우크라이나 일대에서는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주류인 서유럽과 또 다른 종교 체계가 살아 있다. 냉전 시기 사회주의적 삶을 경험한 기성 세대와, 자유주의 교육을 받은 신세대 사이에는 가치관 차이가 크다. 그 간극이 때때로 극단적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동구권 국가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정립한다. 결국 동구권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는 과거를 청산하고 현재의 국제 사회 속에서 자립적 위치를 찾는 이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냉전의 잔재, 아직도일까?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지 한 세대가 지났지만, 동구권에는 그 시절의 궤적이 짙게 남아 있다. 거대 국영기업이 운영되던 흔적, 중앙집권적 통제 구조가 남긴 관료주의가 아직도 일부 행정 조직에 스며 있다. 특정 세대 이상에게 국가란, 모든 것을 결정해주는 절대적 존재였고, 그로 인해 주민들이 개인의 선택권을 스스로 행사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위기나 최근의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에서 국가 주도의 강력한 통제 시스템을 선호하는 흐름이 동구권 일부 지역에서 다시 부활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동구권 국가들이 모두 동일한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폴란드는 유럽연합의 경제 지원을 등에 업고 IT, 자동차 부품 산업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체코 역시 관광·서비스 산업이 발전하며 서유럽 수준의 경제 지표를 기록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크림 반도 문제로 인한 영토 분쟁과 러시아와의 갈등을 빚는 등 경제 발전의 골든타임을 놓쳤다. 헝가리는 오르반 총리의 강력한 국가주의 정책으로 서방세계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렇듯 동구권은 수직적 공산권으로 묶였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다각도로 분화한 다양한 정치·경제 양상을 드러낸다.

 

여전히 러시아는 이 지역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러시아가 소련 시절의 유산을 바탕으로 구소련권 국가들을 자신들의 형제 국가로 규정하는 것도 그 맥락이다. 다만 동구권 상당수 국가들은 이미 EU와 NATO에 가입하거나 가입을 희망하며, 러시아의 구심력에 맞서거나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과거 냉전 구도가 보였던 미국 vs 소련 식의 단순 대결 구도는 희미해졌으나, 그 유산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기에는 여전히 미묘한 다툼과 이해관계가 남아 있다.


서구와 동구의 경계, 얼마나 달라졌을까?

‘동구권’이라 부르는 지역은 광범위하고 다층적이다. 과거에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소련의 위성국가들이 공산권의 영향 아래 하나의 덩어리로 묶였다. 그러나 냉전 체제 붕괴 후, 같은 슬라브어권 국가라도 나토(NATO)와 유럽연합(EU)에 속해 서방체제에 편입된 곳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러시아 혹은 독자 노선을 걷는 곳도 존재한다. 지리적 구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국가가 채택한 정치 제도, 경제 발전 수준, 국제 사회에서의 지향점이다.

 

동구권이라는 용어가 사실상 낡았다는 주장도 있다. 21세기 초연결 사회에서 자본이동과 노동력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예전처럼 이념에 따른 분절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는 서구 국가들도 자국 우선주의를 외치고, 동구 국가들도 자유경제체제를 받아들여 다채로운 모습을 보인다. 다만 아직까지 동구권 국가는 과거 공산주의 시절의 교육, 행정, 외교 정책 등 제도적 유산을 완전히 해체하지 못했다. 국제 정치 무대에서 러시아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고, 유럽연합은 동구권 국가들을 내부 규범에 맞추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동구권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중요하고, 대단히 현실적인 의미를 지닌다.

 

동구권을 이해하려면 유럽 전체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함께 살펴야 한다. 서유럽에서 촉발된 자유주의 혁명과 산업화가 동유럽에 전파되면서 생긴 시간적·질적 격차, 종교 개혁이나 르네상스가 미친 영향의 차이, 20세기 들어 격화된 두 차례 세계대전과 냉전의 소용돌이가 모두 오늘날의 동구권을 만들었다. 수십 년 간 자유진영에 속하지 못하고 공산주의 체제 아래 묶였던 역사는 세대가 바뀌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동구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치, 경제, 문화가 동시에 변혁을 거듭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동구권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곳이 단순히 옛 공산권으로서의 역사적 중요성만 가진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동거하기도 하며, 소비문화와 전통적 공동체 의식이 공존하기도 한다. 그 파노라마가 바로 21세기의 역동성을 상징한다. 유럽을 남과 북, 서와 동으로 단순하게 나누는 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 경계가 완전히 소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해의 시작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다층적 시선이다.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동구권이 어디로 향할지, 지켜볼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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