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금이라는 힘, 현물 자산
우리가 편의점에서 초콜릿을 사듯이, 혹은 서점에서 책을 사듯이 돈을 건네고 바로 물건을 받아드는 경험은 너무 익숙해서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경제학에서는 이런 즉시 교환이 일어나는 모든 것을 현물 거래라 부른다. 여기서 ‘현(現)’은 현재라는 뜻이고, ‘물(物)’은 물건뿐 아니라 대상이 되는 것을 넓게 가리킨다. 그래서 현물 자산은 지금 바로 내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실물’과 ‘현물’은 꼭 같은 말이 아니다. 금괴나 밀가루 같은 물건이 대표적인 실물 현물이지만, 통장 속 숫자로 존재하는 주식이나 달러 예금도 현물 자산이다. 돈을 내고 나면 그 자리에서 소유권이 내 이름으로 옮겨오고, 언제든 원하면 다른 사람에게 즉시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눈에 잡히지 않는다고 현물이 아닌 것이 아니다. 비트코인도 마찬가지다. 화면 속 지갑 주소뿐이지만, 블록체인 기록 덕분에 즉시 교환할 수 있다는 조건을 만족한다.
그렇다면 실체가 있는 물건과 없는 자산 사이에서 현물이란 단어가 유지되는 이유는 뭘까? 핵심은 시간이다. 기다림이 거의 없는 즉시성이 현물의 본질이다. 바닷가에서 조개를 주워 바로 교환하던 원초적인 경제부터, 터치 한 번으로 외환을 바꾸는 스마트폰 앱까지 이어지는 길 위에 현물이라는 큰 간판이 서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현물 자산은 가격 변동 리스크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오늘 사면 곧바로 시세 차트가 변화하고 마음이 약해지면 내일이라도 팔 수 있다. 금을 예로 들면, 국제 가격이 빠르게 꿈틀거리는 날이면 현물 금값도 즉시 반응한다. 실물이든 디지털 증서든 실시간으로 똑같이 뛰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물의은 일정한 제한도 있다. 레버리지를 크게 쓰기 어렵고 가격 하락기에 돈을 벌 방법이 제한적이다. 흔히 “현물은 천천히 부자가 되게 하지만, 빨리 망하는 것도 막아준다”는 말도 있는데, 여기에는 안정적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반면 더 큰 욕심이나 위험 대비 전략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미래를 자산으로 바꿔 놓은 특별한 계약을 찾는다.
미래를 사고파는 법, 선물 자산
선물(先物)은 한자로 먼저 선, 물건 물을 쓴다. 먼저 약속한 물건, 다시 말해 미래 어느 날에 정해진 가격으로 사고팔기로 한 계약 자체가 자산이 된다. 역사 수업에서 배우는 메소포타미아 점토판에도 곡물 예약 계약이 남아 있을 만큼 오래된 아이디어다. 다만 현대 선물시장은 레버리지, 증거금, 만기, 롤오버 같은 복잡한 규칙을 더했고 컴퓨터 코드 위에서 초단위로 가격이 흔들린다.
선물 자산은 두 방향 모두에서 수익 기회를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만약 석유값이 내릴 것이라 예측한다면, 오늘 높은 가격의 석유 선물 매도 포지션을 잡아 둘 수 있다. 실제로 2020년 4월, WTI 원유 5월물 선물은 -37달러까지 추락했다. 파이프가 가득 찼지만 원유를 진짜 받기는 어려운 투자자들이 어디서든 계약을 떠넘기려고 마이너스 값까지 던진 것이다. 이때 매도 포지션을 가진 일부 트레이더는 가격이 내려간 덕분에 돈을 벌었다.
또 다른 장점은 헤지(Hedge) 기능이다. 항공사는 항공유 값이 오르면 피해가 크다. 그래서 미리 일정량의 석유 선물을 매수해 둔다. 실제 값이 오르면 항공유 구입 비용은 늘어나지만, 선물 계약에서 차익을 받아 충격을 완충한다. 반대로 값이 떨어지면 선물 계약에서 손실이 나지만, 실제 연료 값이 줄어들어 상쇄된다. 위험을 시간 속으로 미리 펼쳐서 비용을 평탄하게 만드는 묘수다.
물론 선물에도 뾰족한 가시가 있다. 만기일마다 계약은 사라지기에 원하면 계속 이어가야 한다. 이를 롤오버라 부르는데 이렇게 갈아탈 때 가격 차이로 인해 손해를 보기도 한다. 레버리지가 크다면 증거금 부족으로 강제 청산에 휘둘릴 위험도 있다. 워런 버핏이 “파생상품은 때로 금융 핵폭탄”이라고 경고한 배경에는 선물이 보여 주는 이 증폭 성질이 자리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선물 시장이 현물 가격을 끌고 가기도 한다는 점이다.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곡물 선물이 급등하면, 아직 수확 전인 밭의 옥수수 예상 가격이 뛰고 현물 옥수수도 따라오르기도 한다. 2020년 4월, WTI 원유 선물 가격이 급락하자 현물 원유 거래가격도 선물에 끌려 동반 폭락했다. 이때 선물 만기일이 다가오면서 거래량이 급감했고, 사람들이 "실제 현물 원유도 곧 처치 곤란해질 거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래서 선물 가격이 먼저 떨어질 때 그 뒤를 따라 현물 가격도 급락한 것이다.
디지털 자산 쪽에도 선물은 빠르게 퍼졌다. 2017년 시카고선물거래소가 비트코인 선물을 도입했는데, 현물로 정산하지 않는 현금 정산 방식이었다. 덕분에 기관투자자는 직접 지갑을 관리하지 않아도 가격 변동에 베팅할 수 있었다. 이후 등장한 비트코인 현물 ETF가 현물 기반 상품이 나왔다고 주목받았는데, 그중 한가지 이유는 그동안은 선물 기반 상품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실체와 가치 사이, 디지털 시대의 선택
이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물건=가치’라는 오래된 공식을 점점 놓아 주고 있다. 게임 아이템, NFT 예술품, 스트리밍 구독권처럼 만져지지 않는 것들이 지갑 안에서 당당히 자산으로 활약한다. 가치를 지탱해 주는 건 약속의 네트워크다. 서버와 블록체인, 정부와 법, 사용자와 투자자의 믿음이 서로 엮여 커다란 그물을 만든다.
현물과 선물의 기준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첫째, 지금 교환 가능한가? 그러면 현물이다. 둘째, 교환 시점이 미래인가? 그러면 선물이다. 이 두 질문으로 대부분의 자산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실체가 없다고 해서 위험이 반드시 크거나 실체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안전한 것은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미국 주택 담보 채권(실체: 집)이 무너졌고, 2022년엔 루나 코인(실체 없음)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결국 투자자는 가치 결정 구조와 위험 통제 장치를 함께 살펴야 한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세상에서 소유한다는 말은 곧 기록을 점유한다는 뜻에 가까워졌다. 장부가 실물이 되었고, 전기가 금고가 되었다. 이 거대한 변화 앞에서 중요한 것은 복잡한 용어에 겁먹지 않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교환 가능한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현물과 선물, 실물과 디지털, 오늘과 내일의 가격을 잇는 길 위에서 그 질문이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다.
취미로 투자 더 보기
채굴기가 꺼지면 비트코인 가격이 오른다? 채굴자의 비명과 가짜 희소성 (0) | 2025.04.29 |
---|---|
투기꾼이 필요 악이라고? 투자와의 차이점까지 (0) | 2025.04.28 |
20% 하락하면 25% 수익을 내야 본전이라고? 그럼 25%, 50%는? (0) | 2025.04.27 |
이쁜 차트의 함정, 우리 같은 트레이더들은 이렇게 대응하는 게 최선! (0) | 2025.04.27 |
GALA 이쁜 차트를 조심할 것(매매일지) (0) | 2025.04.27 |
다들 No라고 말할 때 Yes라고 말하는 종목(매매일지) (0) | 2025.04.25 |
왜 매달 차트가 출렁일까? 옵션 만기의 비밀 (0) | 2025.04.25 |
파생상품은 뭘까? 기온도 주식처럼 사고판다고? (0) | 2025.04.24 |
수익률만 보면 안 되는 이유? 이 것도 꼭 따져보세요! (0) | 2025.04.23 |
카피 트레이딩 시작, 계정 만들었지롱(매매일지) (0) | 2025.04.2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