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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에서 심리까지 사고 파는 파생상품의 등장

19세기 시카고 곡물시장의 포효는 파생상품의 원형이었다. 들판에서 막 탈곡한 옥수수는 증기기관차를 타고 도시로 들어왔지만, 가격 불확실성은 농부와 상인을 동시에 떨게 했다. 미래의 특정 일자에 일정한 가격으로 교환하자는 선도계약이 여기서 태어났고, 표준 규격이 더해져 선물(futures)이 탄생했다. 이후 옵션, 스왑, 합성(synthetic) 파생상품’이 잇따랐는데, 이들은 실물 곡물 대신 지수, 금리, 통화, 심지어 시장의 공포(VIX) 같은 상태를 기초자산으로 삼는다.


파생상품은 크게 세 가지 요소를 특징으로 진화했다. 첫째, 수단의 복잡성이다. 블랙-숄즈 모형,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 등이 위험/수익 곡선을 정교하게 그려냈다. 둘째, 참가자의 확장이다. 농부와 상인을 넘어 연금, 헤지펀드, 개인 트레이더까지 진입했다. 셋째, 안전장치의 발전이다. 거래소가 증거금, 가격제한폭, 실시간 정산(Mark-to-Market) 제도를 도입하는 등으로 도미노 파산 가능성을 관리한다.


그렇게 파생상품은 점점 실물을 보유해야 한다는 전통적 통념을 벗어던졌다. 가격 변동 자체나, 변동을 야기하는 요인, 심지어 변동성 그 자체가 거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트레이더는 구리를 만져본 적 없어도 런던 금속거래소에서 구리 선물을 팔 수 있고, 투자자는 유가와 금리의 상호작용을 스왑 계약으로 엮어 회사채 위험을 줄인다. 무형의 수치까지 자산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늘을 거래하는 계약의 모습

1990년대 후반, 미국 텍사스 전력 회사 엔론은 혹독한 더위가 전력수요를 폭발적으로 밀어 올린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섭씨 1도만 높아져도 변압기가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기온 리스크를 돈으로 잠그면 어떨까?”. 날씨 파생상품(Weather Derivatives)’은 이렇게 산업 현장의 요구를 바탕으로 태어났다.


예시가 될 수 있는 상품은 HDD(Heating Degree Days)·CDD(Cooling Degree Days) 선물이다. 기준온도를 넘어선 누적치가 클수록 냉방과 난방 부담이 커진다는 점에 착안했다. 계약 구조는 단순하다. 예컨대 7월 서울 CDD 선물 1계약은 “(7월 평균기온 − 기준온도) × 1 만 원”이라는 공식으로 현금 결제된다. 실제 평균이 29도라면 11CDD((29 - 18) x 1), 결제액 11 만 원이다.


날씨 파생상품의 매력은 물리적 인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기에 여름 한 줌을 인도할 수 없으니, 거래소는 공식 기상 데이터와 중앙 청산소(CCP)를 결합한다. 매도자는 변동 예치금을 통해 손실을 충당하는데, 파산하는 경우에는 CCP가 디폴트 기금(Default Fund)으로 대체 지급한다.


실전 사례는 이미 넘친다. 미국 중서부 옥수수 농가가 봄 가뭄에 대비해 강수량 옵션을 매수하고, 프랑스 와이너리가 이상고온 리스크 헷지를 위해 평균기온 선물을 산다. 2019년 도쿄 올림픽 조직위는 폭염보험과 CDD 파생계약을 묶어 경기 중단 손실을 분산시켰다. 자연현상→경제손실→금융계약이라는 고리가 촘촘해진 것이다.


그러나 비판 역시 거세다. “하늘에 돈을 거는 것은 투기다”, “기후위기로 변동성이 가팔라지면 기존의 시스템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로 2023년 유럽 폭염 때 일부 에너지-옵션 매도자가 증거금 한도를 초과해 CCP가 긴급 청산을 단행한 바 있다. 그럼에도 기후변화가 심화될수록 온도·강수·풍속 기반 상품은 더 넓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눈보라에 의존하는 캐나다 스키장, 장마에 수익이 달린 한국 호프집, 태풍 길목에 선 컨테이너 항만까지 날씨와 월급이 직결된 산업이 끝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리스크, 중앙 청산소, 무형자산 시장의 미래

파생상품 생태계의 심장은 CCP(중앙 청산소)다. CCP는 모든 계약을 중앙에서 제어하며 매수자에게는 매도자가 되고 매도자에게는 매수자가 된다. 이는 곧 불이행 리스크를 시스템에이 통제한다는 뜻이다. 구조를 이루는 세 기둥은 초기 증거금, 변동 증거금, 디폴트 기금이다. 특히 변동 증거금이 매일 손익을 정산하면서 거래소는 한 번의 큰 폭발을 수많은 작은 진동으로 쪼개어 관리한다.


그렇지만 CCP가 만능은 아니다. 리스크 집중 기관이기에 만약 다수 참가자가 동일 방향으로 과도하게 몰려 한계치를 넘어서면 CCP 역시 유동성 위기를 맞는다. 2020년 코로나 충격 당시 일부 금리 스왑 청산소는 정부, 중앙은행과 비상 유동성 라인을 열어둘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기후 파생상품이 확대되면 극단적 기후 이벤트가 한계를 더 빈번히 테스트할 것이고 증거금 산정 알고리즘 역시 꾸준히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무형자산 파생상품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SNS 감성지수, 전기차 배터리 재활용 크레딧, e-스포츠 리그 트래픽, 심지어 개인 건강데이터까지 측정 가능한 모든 숫자는 기초자산이 될 수 있다. 이때 관건은 데이터 조작과 프라이버시다. 예를 들어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은 온체인 상의 검증된 데이터만 파생상품화한다고 주장하지만 기술만이 전부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윤리, 규제, 사회적 합의가 함께 따라 주어야 한다.


결국 파생상품은 시대마다 불확실성의 얼굴을 금융 언어로 번역해왔다. 곡물 가격, 금리, 주가지수, 변동성, 기후, 그리고 내일 우리의 감정까지. 가격은 그저 숫자지만, 숫자는 곧 인간의 공포와 욕망이라는 점에서 파생상품은 인간 심리의 거울이다. 리스크를 거래하며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것은 예측 불가성을 인정하고 비용을 지불하려는 의지다. 하늘의 온도를 사고파는 지금, 다음 차례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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