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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빵 한 조각, 그리고 죽음의 무게
동이 터 오기 직전의 새벽, 낡은 시골집에 빵을 한 조각 가져다 놓는 일을 상상해 본다. 한평생 죄를 짓고도 제대로 사죄할 틈 없이 떠나버린 영혼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는 빵에 스며든 죄를 먹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무런 신학적 정당성도 없고, 과학적 근거도 없지만, 미묘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죄식자(Sin-Eater)’의 전설은 그렇게 과거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구석에서 되뇌어졌다.
죽은 자의 위에서 빵과 맥주를 먹는다는 행위는 신성모독에 가까운 의식으로 여겨졌다. 누군가는 그것을 역겨운 미신이라 했고, 누군가는 마지막 순간의 자비라고 옹호했다. 한쪽에서는 죄를 옮긴다고 말했고, 다른 쪽에서는 죄가 전이되기보다는 단지 살아 있는 이들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의식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관습이 어떤 미묘한 위안책이었건, 그 덕에 한 시골마을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던 떠돌이들은 생계를 이을 수 있었다. 가난했던 자, 천대받던 자, 사회적 추방자들이 모호한 '죄를 먹는다’는 행위로 겨우 살 길을 찾았다.
끼니가 곧 구원의 길이었던 사회
17세기부터 19세기 무렵,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농촌 풍경은 목가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교회마다 목회자가 충분히 배치된 것도 아니었고, 가난한 농민들은 죽어가는 가족에게 남은 마지막 자비를 베풀 돈도 없었다. 성직자를 모셔 고해성사를 하는 일은 도시의 부유층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로 여겨졌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풀 방법 자체가 완전히 단절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작은 동전이나 빵 한 덩이를 내밀며 “우리 가족의 죄를 대신 가져가 달라”고 요청했다. 종교에서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은 그 의식은 기이한 직업을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Sin-Eater라는 이름으로 마을 주변을 떠돌며, 죽은 이가 남긴 무언가를 대신 먹고 마셨다. 비록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시장에서 구걸하는 것보다는 나았다고 말한 기록이 일부 남아 있다. 빵 한 조각의 대가를 받은 이들이 느꼈을 조용한 방 안의 공기는 몹시 기묘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게 “죄를 먹었다”고 손가락질하며 경멸했지만, 동시에 이들을 찾아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죄의 전이 같은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많다. 하지만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무게가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짓누를 수 있는지 생각하면, 인간은 그저 어떤 의식을 통해 안식을 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사라진 풍습 뒤에 남은 불편한 질문
19세기 중후반 이후, Sin-Eater 풍습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웨일스와 잉글랜드 시골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존재했고, 도시화와 산업화가 빨라지면서, 농촌 중심의 전통 의식들은 사라질 운명이었다. 특히, 전염병이 퍼지던 시기에 시체와 가까이하는 행위 자체가 위험하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빵을 시체 위에 두고 먹는 행위는 금기시되곤 했다.
실질적으로 이 풍습이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던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있지만, 학자들은 “정말로 스코틀랜드나 다른 지역까지 퍼졌는지 확실치 않다”는 입장을 보인다. 웨일스와 잉글랜드 국경 지대, 혹은 특정 마을의 구전 설화 수준으로만 전해지는 사례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Sin-Eater라는 제도가 종교와 상관없는 민간 의식으로 간주되어, 공식 문헌에 남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교계에서 ‘이단적’이라고 혐오했던 의식일 수도 있고, 단지 미신으로 치부되어 역사 기록에서 배제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이 풍습을 두고, 실체 없는 전설로 치부하기보다는 어떤 사회적 필요와 감정이 얽힌 결과물로 이해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죄를 ‘다른 누군가’가 떠안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인간의 바람이 그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 해소를 위한 심리적 장치였을 뿐이라고 말하기엔, 의식 자체가 꽤나 구체적이었고, 그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던 실제 사람이 존재했다는 점도 함께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늘도 이어지는 ‘죄의 전가’
현대 사회는 더 이상 빵 한 조각 위에 죄를 담지 않는다. 대신 사법 제도나 교회와 같은 공식 종교 기관이 죄의 무게를 판단하고 재단한다. 자백과 참회, 그리고 사회적 처벌이 이어지는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누군가 죄를 뒤집어써주는 희생양(Scapegoat)을 찾으려는 경향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기업이 잘못된 의사결정을 했을 때, 특정 임원이나 직원 하나를 ‘Sin-Eater’처럼 몰아세우는 광경이 벌어진다. 아니면 정치적 책임을 누군가 혼자 짊어지고 사퇴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죄식자라는 옛 관습과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묘한 느낌이 든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Sin-Eater는 빵과 약간의 돈을 받는 대신 온갖 손가락질을 견뎌야 했고, 현대의 희생양은 사회적 지위를 잃거나 법적 책임을 뒤집어쓰는 식으로 한 사람이 죄의 무게를 감당하게 된다는 점이다. 미신적 의식이 사라졌을지언정, 누군가가 죄를 짊어진다는 구조만큼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
스스로 지은 죄를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도, 인간은 집단이익을 지키거나 면피하려는 순간, 누군가에게 일부 또는 전부를 떠넘기는 전략을 구사하곤 한다. 너무나 본능적이고, 어쩌면 인간 사회가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으레 벌어지는 모습이다.
이야기의 끝자락
가난과 미신이 팽배했던 어느 시골에서 묵묵히 빵을 먹던 Sin-Eater의 모습은 이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인간이 죄책감을 감당하는 방식, 공동체가 한 개인에게 죄를 떠넘기는 역학 관계,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언제나 ‘면죄의 유혹’을 느끼는 인간 본성이 모두 응축되어 있다.
비합리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누군가의 죄를 대신 가져간다는 설정은 수없이 많은 이야기, 영화, 게임, 소설에서 변주된다. 옛날보다 훨씬 세련된 방식으로 ‘속죄’나 ‘희생’을 다루는 매체를 본다면, 미신이 아니라 인간의 뿌리 깊은 상상력이 빚어내는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 죄를 털어내고 싶은 마음. 그 마지막 순간의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줄 타인을 고대하는 마음. 이 간절함이 빚어낸 풍습이 하나의 직업으로 치환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염원이 얼마나 집요한지 새삼 느끼게 한다. 비록 Sin-Eater라는 의식은 조용히 역사의 뒷골목으로 사라졌지만, 죄를 옮기려 했던 그 의도 자체는 아직도 우리의 일상과 사고방식 곳곳에서 어른거린다.
그 모습이 의도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다. 잘못을 인정하기 어려운 존재. 동시에 죄를 용서받기 위해 끝없이 의식과 상징을 만들어내는 존재. Sin-Eater의 전설은 한낱 미신이 아니라, 그렇게 내면의 그림자를 외부로 떼어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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