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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이 불러온 위기, 준비가 지켜낸 생존
붉은 숫자가 모니터를 뒤덮던 1997년 가을, 월가의 바닥은 싸게 살 기회라는 흥분으로 진동했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뉴욕까지 번졌지만 사람들은 방금까지의 강세장을 기억하며 아쯤 되면 반등할 것이라 믿었다. 금융 방송은 저점 매수라는 구호를 쉬지 않고 내보냈고, 거리의 택시 기사까지 지금 사면 늦어도 연말엔 웃을 것이라는 예언가 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마크 미너빈은 차트를 접고 현금을 택했다. 그의 노트에는 간단한 문장만 남았다. ‘시장 지수 50일선을 장대 음봉으로 이탈, 거래량 급증. 조건 무효.’ 대중의 확신이 높아질수록 그는 오히려 매수 버튼에서 손을 뗐다.
미너빈에게 시장은 콘서트의 청중이 아니라 타이타닉의 빙산이었다. 빙산과 정면 충돌을 피하려면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레이더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레이더가 바로 그가 사용하던 체크리스트였다. ‘가격 패턴 완성, 거래량 2배, 업종 선두, 하락 변동성 축소, EPS 성장률 20% 이상, 리더십 대장 종목’ 등 구체적 숫자와 조건만 입력됐다. 하나라도 틀어지면 전량 청산. 확신이 아니라 규율이 그를 살렸다. 놀라운 점은 그 결정이 매매 일지의 잉크만큼이나 담백했다는 사실이다. 친구들이 겁이 많다고 놀릴 때도 그는 겁은 리스크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라며 관리의 대상으로 삼을 뿐이었다.
시장은 공평하다. 겁을 가진 자에게 살아남을 기회를, 확신을 가진 자에게 오만의 대가를 준다. 월가는 항상 기회의 신화를 갈아치우는 곳이다. 증권사 리포트는 평생을 데이터로 장식하지만 그 맨 끝에는 주로 우호적 전망이라는 마법의 단어가 붙는다. 레버리지를 조장하는 파생 상품 광고는 두 배의 수익을 약속하면서도 두 배의 손실은 잘 비추지 않는다. 확신은 창문 너머로 퍼져 나가는 향수처럼 달콤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며 위험하다. 미너빈이 1997년 본 것은 향수가 아니라 불꽃이었다. 그는 어느 칼럼에서 “다들 연금술을 찾을 때 나는 소화기를 찾았다”고 썼다.
체크리스트가 감정을 묶을 때
미너빈은 특이하게도 감정을 제거하는 대신 스프레드시트에 가두었다. 종목 옆마다 ‘Y’와 ‘N’이 빼곡히 적었다. 집요하게 기다리던 매매 패턴이 막 완성되었던 2004년 봄, 열두 칸 모두 ‘Y’가 채워지자 그는 4% 손절을 걸고 포지션에 진입했다. 매수 사인은 자신감이 아니라 실험이었다. 결과는 8주 만에 70% 수익. 그는 결과를 자랑하는 대신 ‘다음 실험까지 휴식’이라 적었다.
반대로 1995년, 패턴이 어설픈 기술주에 느낌으로 진입했을 때는 손절을 미루다 -20%로 끝났다. 그는 패배를 탓하기보다 스프레드시트를 보강했다. 그는 체크리스트를 회계처럼 냉정하게 다뤗다. 조건이 빠진 행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경고했다. 그 구조 덕분에 심리적 흔들림, 즉 FOMO가 들어올 틈은 점점 좁아졌다. “대중의 기회는 내 기준의 공백”이라는 문장이 노트 상단을 차지했다. 그렇게 기분 좋은 루머와 차트의 숫자가 충돌하면 후자에 베팅했다.
오늘날 알고리즘 트레이딩이 신호 한 줄로 수백만 달러를 움직이는 세상에서 그의 체크리스트는 가내 수공업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 직접 읽고, 직접 멈추고, 직접 청산하는 그 몇 초가 운명을 가른다. 아직도 기계와 알고리즘이 모방할 수 없는 영역은 규율 자체가 아니라 규율을 존중하는 인간의 끈기다. 그래서 그는 “시스템은 중요한 게 아니라, 시스템을 어기지 않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체크리스트의 항목은 잔혹할 정도로 정직하다. 경영진이 주식을 사고파는 내부자 거래 패턴, 기관 투자자의 순매수 그래프, 섹터별 강도 지수 변화 같은 세부 지표가 평범한 단어로 배열된다. ‘기관 집중도 60% 이상, 내부자 순매수 비중 15% 이상’ 같은 수치가 입력돼 있다. 이 수치는 느낌이 좋다는 표현보다는 피로하고 따분한 게 맞다.
시장은 실패를 기록하는 자를 기억한다
실패를 적는 방식도 흥미롭다. 그는 손실이 확정된 날 저녁, 차트를 스크린샷으로 저장하고 옆에 ‘심리적 트리거, 시스템 경고 무시, 손절 지연’이라는 세 단어를 적는다. 한 장의 이미지와 세 단어면 자만을 꺾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 이미지를 다이어리 첫 페이지에 붙여 새 장을 시작한다. 실패를 숨기지 않고 첫 페이지에 박제함으로써 다음 매매에서 다시 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시스템을 어긴 과거의 내가 나를 지켜보는 구조다. 감시가 아니라 학습이다. 대중이 유튜브에서 ‘단숨에 부자 되기’ 영상을 찾아낼 때, 그는 과거의 자신이 흔들린 영상을 돌려본다. 괴로운 의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면역 주사다.
오늘날 개인 투자자는 스마트폰으로 옵션까지 손쉽게 매매한다. 알고리즘이 뿜어내는 색상과 막대 그래프는 화려하지만, 정작 필요한 버튼은 화면 위 작은 주문 취소일 때가 많다. 미너빈의 교훈은 하이테크 시대에 더 선명하다. 데이터는 늘었지만 인간의 탐욕은 더 빨라졌다. 탐욕 앞에 놓인 유일한 방어막이 바로 기록과 규칙이다. 기록을 남기고 규칙을 지키는 일은 무료하지만 그 무료함이 결국 자산과 미래를 지킨다. 이 교훈은 투자가 아닌 어느 시장에도 적용된다. 확신으로 이리저리 바꾸며 오만하기보다 반복되는 역량 표를 작성하고 다듬고 업데이트하는 사람이 결국 기회를 잡고 위기를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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