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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공기만 먹고 산다’는 이야기에 매혹되는가?

세상에는 믿기 힘든 이야기가 많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브레서리언(Breatharian)’이라는 존재다. 공기와 햇빛만으로 생존한다는 주장이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과학적으로 성립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에 쉽게 매혹될까. 우선, 인간에게는 늘 초월에 대한 갈망이 자리한다. 모든 것을 초월해 신성에 이르고 싶은 욕구가 존재한다. 종교나 영성 활동에서 오랜 단식이 수행의 일부로 자리해온 전통도 이러한 갈증을 부추긴다.


여기에 더해, 현실을 뛰어넘는 주장일수록 주목받는 세태가 한몫한다. 소셜 미디어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빠르게 확산되는 시대다. 대담하게 ‘나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외치는 이가 있으면, 수많은 이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시선을 쏟아낸다. 이 과정에서 객관적 검증은 뒷전으로 밀리고, 자극적인 서사가 먼저 귀를 사로잡는다. 이러한 심리가 뭉쳐 공기만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전설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사람들의 내면에는 경이로운 체험을 간접적으로라도 맛보고 싶은 바람이 조금씩은 있다.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고, 삶의 무게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욕망이 잠들어 있다. 이때 브레서리언이라는 개념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이들의 마음에 꽤나 달콤하게 다가온다. 당장 굶주림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혹은 몸과 마음이 더 가벼워질 수 있다면 매력적인 유혹이 된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매혹은 늘 현실과 부딪친다. 결국 사람들은 언젠가 정신적·육체적 한계에 부딪히고, 그 때 ‘정말 이게 가능한가’라는 본질적 의문에 맞닥뜨린다. 초자연적 분위기를 풍기는 신비담일수록, 그 저변에 깔린 상식과 과학의 원리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랜 단식, 정말 실현 가능한가?

공기만으로 산다는 주장은 현실에서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 인간의 생리학적 구조를 생각하면, 물과 최소한의 영양소 없이는 오래 버틸 수 없다. 물론 일정 기간 음식 섭취 없이 생존하는 사례는 존재한다. 유명한 예로, 스코틀랜드 출신 앵거스 바비에리(Angus Barbieri)가 382일간 단식을 한 사건이 있다. 물과 비타민, 전해질을 꾸준히 보충받았다는 점이 핵심이다.


장기간 단식 상태에서는 체지방과 단백질을 에너지원으로 쓰게 된다. 글리코겐이 고갈되면 지방이 분해되고, 케톤체가 생성되어 뇌와 몸에 공급된다. 사람에 따라 체지방이 풍부하면 그만큼 더 오래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 단식조차도 필수 미네랄과 비타민, 전해질을 어느 정도 공급받아야 한다. 완전히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는 경우라면, 수분 부족만으로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위험해진다.


그래서일까, 브레서리언을 자처하는 이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완벽한 단식을 지속하는지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 뒤따른다. 공개 실험에 참가했다가 탈수 증세나 영양 결핍으로 중단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수십 년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냈다는 주장에 관찰과 기록이 따라붙지 않는 이유가 있다. 실제로는 몰래 음식을 섭취하거나, 다른 영양 보충원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결국 오랜 단식을 가능케 하는 비법은 신비나 영적 계시가 아니라, 기본적인 인체 생리학의 극단적 활용이다. 지방과 근육을 태워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미량 영양소라도 반드시 외부에서 조달해야 한다.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모두 견뎌야 하니, 일각에서 말하는 ‘햇빛, 공기 섭취’만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은 무색해진다.


영적 탐구와 과학적 검증, 충돌하는가?

단식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고자 하는 영적 전통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불교,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 등 다양한 종교에서 단식은 수행의 일부다. 이를 통해 몸을 혹독하게 단련하고, 물질적 욕구를 내려놓는 과정을 거치면서 내면에 집중한다. 여기서 단식이 어느 정도 영적 체험에 기여한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극단적인 단식, 예컨대 아예 먹지 않는다는 수준에 이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영적 수행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도, 최소한의 물과 소금, 영양 보충을 완전히 배제하고 수년을 버틴다는 이야기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실제로 과학적 검증 시도에서 관찰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았거나, 허점이 드러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승이나 단식 사례가 모두 거짓인 걸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적 깨달음의 경험은 진실일 수 있되, 그 과정을 미화하거나 과장하는 서사는 얼마든지 추가되기 쉽다는 점이다. 수행자가 하루 정도 공복을 유지하는 체험과, 공기만 마시고 수십 년 지낸다는 주장 사이에는 엄연히 큰 간극이 존재한다. 영적 탐구와 과학적 검증이 결코 대립할 필요는 없다. 단지, 신체 기능이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영성만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브레서리언이 계속 등장하는 사회적 이유는 무엇인가?

합리적인 수준에서 불가능함이 드러나는데도, 왜 이런 주장이 계속 떠오르는 걸까. 첫째로, 가시적 증거가 희박할수록 신비로운 매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완벽히 입증하지 못한 영역이라면, 과학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식으로 자존적 세계관을 지킬 수 있다.


둘째로, 스스로 예언자나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브레서리언 수행을 강의료나 책 판매, 워크숍 형태로 상품화하는 이들도 있다. 경제적 이득이 결합되면, 돌이킬 수 없는 사기 혹은 과도한 신념이 굳어진다. 건강에 해를 끼칠 위험성은 무시되고, 초자연적 설화가 더욱 부풀려진다.


셋째로, SNS와 유튜브를 통한 정보 확산 속도가 이를 증폭한다. 몇 장의 사진, 단 몇 분의 영상으로 전혀 음식 없이 살고 있다는 자극적 주장이 퍼져나간다. 대중에게는 재미 없는 실험 결과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짧고 충격적인 스토리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클릭 수와 조회수가 올라가면, 더 극단적인 이야기가 시장 가치를 얻게 된다.


결국 브레서리언 현상이 계속 반복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영적 갈증과 자극적인 서사에 얼마나 쉽게 휩쓸리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검증 과정 없이 희망적 판타지를 좇는 기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적나라한 사례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브레서리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공기만 먹고 산다는 이야기는 신비를 갈망하는 이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그러나 신비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몸과 정신을 혹사하거나, 객관적 검증을 무시한 채 맹신에 빠지는 일은 위험하다. 장기간에 걸친 단식조차도 매우 신중해야 하며, 전문적 관리와 보충이 필수다. 그것이 비타민이든, 전해질이든, 결국 물질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다. 자극을 주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그 한계를 초월한다는 발상은 늘 긴장감을 수반한다. 오히려 공기만으로 산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실제로는 몰래 무엇인가를 섭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현실적이다. 혹은 일부가 짧은 기간의 극단적 단식을 영원한 수행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인체와 정신이 어떤 경이로운 역량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곧 물리적 현실을 부정해도 된다는 라이선스는 아니다. 내면의 탐구는 힘든 과정을 수반하고, 때로는 통념을 뛰어넘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길이 진실로 이어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판단과 과학적 근거가 필요하다.


브레서리언의 유혹은 깊다. “먹지 않아도 산다”는 말은 식량 부족에 대한 근심, 건강 문제에 대한 고민, 더 나아가 삶의 고단함을 한 번에 해결할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전 세계 어디에도, 검증된 방식으로 음식을 완전히 배제하고 생존한 사례는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결국 최소한의 영양과 수분 공급은 필요하다.

 

마음의 기적을 갈망하되, 현실을 존중하라는 말이 필요하다.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지혜롭고 유연한 시각으로 불가능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성찰이 요구된다. 괴이한 이야기가 귀를 홀릴 때마다, 자문해야 한다. 이 이야기가 과연 검증된 사실인가, 혹은 우리가 만들어낸 달콤한 망상인가. 답은 늘 내면과 과학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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