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제물, 푸른 신전

아즈텍은 묘하게 매혹적인 동시에 섬뜩한 이미지가 있다. 멕시코 고원에 피어난 이 제국은 태양신에게 생명을 바치지 않으면 온 세상이 멸망한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허황된 환상이 아니라, 제국의 존립과 영광을 지지하는 토대였다. 모아이 석상처럼 거대한 신전 위에서 사제가 포로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수천 혹은 수만의 희생이 반복되었다고 전해진다.


문헌에 따르면 15세기 말~16세기 초에 걸쳐 테노치티틀란을 중심으로 일어난 인신공양은 규모나 횟수 면에서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예컨대, 1487년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의식 때는 최대 7만 명이 희생되었을 수 있다는 숫자까지 거론된다. 이 부분은 학자마다 이견이 있지만, 비슷한 시기 다른 지역 문명과 비교해도 상당히 높은 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렇듯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잔혹함의 극치인 아즈텍 의례는, 당대 아즈텍인들에게는 대단히 신성한 봉헌이었다. “태양이 멈추면 세상도 끝난다”는 그들의 공포는, ‘피’를 통해 태양을 매일 새롭게 움직이게 한다는 절박함과 맞닿아 있었다. 비록 오늘날에는 극도로 반인륜적인 행위라 평가받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방식은 일종의 종교적 필수요건이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정복자, 그리고 또 다른 학살자

반면 16세기 초 스페인의 정복사는 또 다른 의미의 파멸을 가져왔다.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딜 때, 초대형 배와 철제 무기로 무장한 병사들의 진군은 이미 시작된 현대 식민지화의 그림자였다.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 땅에 상륙했을 때만 해도, 아즈텍 황제였던 모테쿠소마 2세는 낯선 세계의 침입을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결국 테노치티틀란의 중심부까지 진격했고 문명을 함락시켰다.


문제는 이 정복 과정에서 자행된 대규모 학살과 착취다. 스페인 측 문헌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장면이 ‘두려움 없이 원주민을 도륙했다’는 서술이다. 진보된 무기와 군마를 앞세운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 집단에게 사실상 일방적 학살을 가했다. 게다가 정복 이후에는 엔코미엔다(Encomienda) 제도를 통해 대규모 노동 착취가 이뤄졌다. 광산과 대농장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중노동에 시달린 원주민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수백만 명 단위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아즈텍이 인신공양이라는 상징적 잔혹성을 보여줬다면, 스페인은 인종 차별적 제도로부터 비롯된 조직적 학살을 전개했다는 차이가 있다. 종교재판을 등에 업은 그들의 정복전쟁은 “야만적인 이교도 문명을 교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스페인의 모든 행위는 마치 신의 섭리를 실행하는 것처럼 덧칠되었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 더 야만적인지 판단하기도 힘들 만큼 둘 다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인신공양과 종교재판, 혹은 태양신과 그리스도

신을 위해 사람의 심장을 적출한 아즈텍, 혹은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고문하고 처형한 스페인. 종교가 권력과 결탁할 때 나타나는 무서운 잔혹성의 예로 두 사례를 자주 인용한다.


스페인이 자행한 흑전설(Black Legend)은 아즈텍 등 원주민을 잔인한 이교도로 매도하는 전략이었다. 원주민을 인간 이하로 그려야만, 그들을 정복하고 학살해도 야만인을 교화한다는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즈텍이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인명을 희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페인 또한 기독교를 절대적 선으로 내세워 이단자, 반체제 인사,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등을 가차 없이 살해했다.


종교재판 기록을 보면, 지하감옥에서 가혹한 고문이 이어지고, 이단 혹은 마녀로 몰린 이들은 공개 화형에 처해졌다. 거기에는 정치적 암투나 개인적 원한이 개입되기도 했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증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아즈텍식 희생 의식이 수천 명 혹은 수만 명을 대상으로 한 종교적 의식이라면, 스페인의 종교재판과 식민 통치는 그보다 더 오랜 기간에 걸쳐 방대한 수의 희생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방식만 다를 뿐 잔혹성의 본질은 서로 닮아 있다.


야만의 정의, 그리고 역사의 역설

그렇다면 “누가 더 야만적이었나” 하는 물음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아즈텍이 인신공양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 잔인함의 전형적 사례다. 태양을 위해 인간의 심장을 끊임없이 바치는 모습은, 그 어떤 현대 사회도 묵과하기 어려운 반인륜적 행위다.


하지만 스페인이 진보된 문명으로 평가받으면서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행한 조직적 학살과 노예제도는 다른 의미에서 더 공포스럽다. 한때 원주민 인구가 90% 넘게 줄었다는 연구결과가 있을 정도로 그 파장은 컸다. 문명화라는 이름 아래 일어난 이 대량 학살은, 똑같이 종교적 혹은 정치적 편견이 깔린 결과였다.


결국 야만성이란, 한쪽이 우월하고 다른 쪽은 열등하다는 식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는 방향성이 다른 폭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아즈텍은 주로 공개적이고 의식화된 잔혹성, 즉 의례적 폭력을 선호했고, 스페인은 제도화된 폭력, 즉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한 조직적 파괴를 저질렀다. 인간이 가진 폭력성이 어떤 이름을 달고 나타나든, 근본적 비참함은 유사하다는 사실이 두 문명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다.


미래를 향한 성찰: “둘 중 누가 덜 나쁜가”라는 함정

혹자는 말한다. 아즈텍은 그나마 스페인처럼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지 않았고, 오로지 신과 태양을 위한 희생이었으니 덜 잔인한 것이 아니냐고. 또 다른 이는 아즈텍의 식인 풍습을 들어, 이보다 더 야만적인 문화가 어디 있겠느냐고 반론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분법은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실제 아즈텍의 포로에 대한 인신공양 정책은 각 부족에게 공포심을 심어 제국을 유지하는 측면이 컸고, 스페인의 식민 통치는 백 년 이상 이어지며 대륙 전체를 서서히 잠식했다. 단지 희생 제물의 수치나 학살된 원주민의 통계를 비교해 더 나쁘다거나 덜 나쁘다를 가를 수 있어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든 권력과 종교가 결탁하거나 과도하게 폭력을 행사하면, 그 결과물은 인간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대재앙에 가깝다는 교훈이다. 오늘날에도 세계 여러 지역에서는 여전히 종교적, 이념적 갈등으로 인해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권력이 이를 합리화하거나 선동에 활용하려 한다. 역사가 준 혹독한 사례를 무시한다면, “더 야만적인 것은 저들일 뿐”이라며 서로를 비난하다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낳게 되지 않을까. 아즈텍도, 스페인도, 결국 그 야만성을 인간 사회가 언제나 지닐 수 있는 그림자로서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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